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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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

주제유형
사건/사고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원인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6월 28일 새벽, 국군에 의해 한강의 교량들이 폭파되었다. 당시 한강에는 5개의 교량(이촌동~노량진간의 한강대교와 3개의 철교, 광나루의 광진교)이 있었으며, 수도권내에서 남북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모두 이 교량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의 한강 이남으로의 진출을 막기 위해 이들 교량을 파괴하는 것은 필수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기였다.


내용

한강교 폭파의 근본 목적은 적의 진출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강교 폭파로 인한 부작용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한강 이북에서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채 적과 싸우고 있던 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차단됨으로써 국군 총병력의 거의 절반이 분산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던 것이다. 또한 강북에 있던 중장비와 차량 그리고 곡사포.박격포.기관총 등과 같은 무기도 대부분 유기되었다. 


한강교가 폭파된 6월 2 8일 오전부터 북한군의 전차가 대거 서울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차를 앞세워 거칠 것 없는 공격을 감행했던 북한군도 한강교 폭파로 인해 한강 북쪽에서 일단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한강교가 파괴된 후 서울 북쪽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장병들은 지휘체계가 와해된 상태에서 나룻배와 같은 극히 제한된 도하수단을 이용하거나 모든 장비를 버리고 헤엄을 쳐 한강을 건넜다.


그리고 한강 이북에서 철수해 온 장병들이 한강 남쪽 제방에서 전열을 정비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한강 남안을 따라 방어선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진 방어선은 아니었다. 한강 이주는 천연적인 장애물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미군 지원 병력이 도착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국군지휘부의 최대 희망이었다. 


한강교 폭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들은 이후 아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3개월간 적의 치하에서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강교 폭파의 영향은 심각해 군과 국민들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군 수뇌부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교량 폭파 관계자들을 뒤늦게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여기서 재판부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조기폭파의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최 대령의 사형이 집행된 후 14년이 지난 1964년, 그의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최 대령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 ’한 것이라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그 재판에서 ‘그 상관이 누구인지와 한강교 폭파의 진정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를 밝히지는 않았다.


참고자료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 국방부, 1967.
국방부 <<국방사>>제2집 국방부, 1987.
양영조 외 <<한국전쟁>>(상) 국방군사연구소, 199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제2권 신오성, 2004.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