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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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사건

주제유형
사건/사고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원인

북한은 대남공작이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이래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지하조직 및 불순세력의 선동으로 민중봉기를 획책하여 전쟁도발의 구실을 모색하고 지하조직의 사기신장과 직간접 지원으로 이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무장공비 침투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만큼 투입인원 규모와 그 잔인함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무장공비 침투는 남한 사회를 극도로 혼란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긴장 상태로 조성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내용

북한은 폭력혁명의 일환으로 무자비한 테러 및 파괴활동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상적 중립층의 확대와 당국에 대한 협력을 저지하며, 전후방 동시전투 식의 모택동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군경부대의 분산과 병력소모 및 피로를 촉진시키고, 위조지폐의 대량사용으로 남한의 경제 질서를 혼란시키고자 기도하였다.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신사복·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무장공비들은 1차로 2개조 30명이 1968년 10월 30일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에 침투하였다. 그리고 2차로 2개조 30명도 11월 1일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으로 침투하였으며, 3차로 4개조 60명이 11월 2일 삼척 원덕면 월촌리 고포 해안으로 침투하였다. 생포된 무장공비의 진술에 의하면, 제2차 침투조는 1968년 7월 9일부터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 124군부대 1기지에서 부국장의 지시로 15명 2개조 30명이 평양에서 3개월간 유격훈련을 받고 10월 1일 기차 편으로 영산리에 도착, 30일간의 훈련이후 10월 30일 원산에서 배로 출발하였다. 


3차 침투는 해상 및 해안 경계병에게 발견되기는 하였지만 아군의 조치미흡으로 침투에 성공하였다. 무장공비들은 11월 3일 새벽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이 울진경찰서에 무장공비 출현을 신고하였다. 내용인 즉 이날 아침 무장공비 30여명이 산간마을인 고수동에 나타나 주민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놓고 북한을 찬양하는가 하는, 이에 반항하는 주민들을 칼로 찌르고 돌로 쳐서 죽였다는 것이다. 또 신고할 경우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노동당, 여성동맹 등에 가입하도록 총검으로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공비들은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 등 만행을 자행하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은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하였다.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하여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군경의 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 모두를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리측도 군인, 경찰, 일반인 등 20여명이 사망하는 희생을 치렀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 활동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이며,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 지를 시험해본 것이었다. 토벌작전에서 국군은 북한이 아무리 잔악한 공비를 침투시켜도 이를 격멸할 수 있다는 튼튼한 안보태세를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참고자료

국방부 <<대비정규전사>>제2집 국방부, 1997.
국방군사연구소 <<건군50년사>> 서울인쇄, 1998.
국방부 <<국방사>>제3집 국방부, 1990.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