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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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주제유형
사건/사고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원인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은 미 존슨 행정부 시절이던 1968년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 앞 공해 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82명의 미 해군 인원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승무원들만 풀려난 사건이었다.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 상에서 정보수집활동을 하던 중 북한 함정에 의해 나포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북한군의 발포로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하였다. 미 함정이 공해 상에서 납치되기는 미국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용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 초계정으로부터 첫 공격을 받았으며 14:32에는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연락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는 최종보고를 송신하였다. 미 국무부는 함정과 승무원들을 즉각 석방하도록 소련을 통해 접촉하였다. 푸에블로호는 경화물선을 개조한 해군 정보수집함으로써 무게 906톤, 길이 54m, 폭 10m, 속도 12.2노트이고, 승선인원은 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총 83명이었다. 


푸에블로호는 1월 23일 정오경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 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였다. 이때가 12:40분이었다. 푸에불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즉각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항해중인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3척의 구축함을 진로를 변경시켜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토록 하였으며,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사건은 30여 차례의 비밀회담 끝에 납치된 승무원들이 325일 만인 1968년 12월 23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당시 미국은 반전 여론 때문에 월남전에서 철수를 고려하고 있는 시기여서 한반도의 긴장상태를 원치 않았으므로 많은 양보를 하면서 협상하였다. 납북사건이 발생한 31년이 지난 1999년 북한은 원산항에 있던 것을 김정일 지시에 의해 1999년 10월 대동강 ‘충성의 다리’ 근처로 옮겨 반미교육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이 마무리된 불과 4개월 후인 1969년 4월 15일 미 해군 정찰기 EC-121가 동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됨으로써 또다시 한반도에 급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한 미 해군 EC-121 정찰기는 동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한반도 주변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급파하는 등 한반도에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참고자료

국방부 <<국방사>>제3집 국방부, 1990.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1995.
국방부, <<대비정규전사>>제2집, 1997.
국방군사연구소 <<건군50년사>> 서울인쇄, 1998.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