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석(텡스텐)은 전략물자로서한국전쟁 이후에 그 수요가 증가하여 1951년부터 그 수출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특히 1952년에 체결된 <한미중석협정>을 계기로 그 수출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으나,협정이 종료된 1954년 3월 이후에는 수출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정부는 중석의 수출로 획득한 외환(달러),이른바 중석불(重石弗)로 도입할 있는 물자와 그 도입절차를 규정하였다. 우리나라 정부는 중석불 처분요강에 따라 각 부문의 재건을 위한 물자를 중석불 도입하였으나 최종소비재를 수입하지는 않았다. 1952년 1월 제정된 중석불 처분요강에서 그 용도가 더욱 제한되었다.
당시 외화예치집중제도 아래에서는 우리나라 정부가 획득한 모든 외환은 한국은행의 정부외환계정에 예치하여야 하였다. 민간보유의 외환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제정한 민간계정에 대한 예입 및 그 처분에 관한 규정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으나, 정부의 외환은 정책결정자의 의사에 따라 자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중석불의 경우 처분요령이 있었으나, 이것도 정책결정자의 행정명령에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정부는 1950년과 1951년 흉년으로 식량사정이 악화되자 식량과 식량증산을 위한 비료 도입을 적극 추진하면서 중석불 처분요령을 변경하여 중석불로 도입할 수 있는 물자에 식량과 비료를 추가하였다. 그에 따라 양곡과 비료도입을 위해 불하된 중석불이 그해 9월까지 총 규모는 25건, 483만 5천 달러이었다. 이 중석불이 공정환율로 민간에 불하되고 그에 따라 도입된 양곡과 비료가 판매되면서 무역업자는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중석불을 민간에게 불하할 경우 어떤 환율을 적용하는가가 일차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중석을 수출하여 얻은 외환은 공정환율로 한국은행에 매도되었다.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 정부의 환율인상 또는 환율현실화 압력에도 불구하고 공정환율 1달러 6,000원을 유지하고자 했고, 중석불을 불하할 때도 그 입장을 견지하였다. 공정환율이 시장환율보다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었데, 이 환율을 적용시킨 것도 문제이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이 환율로 양곡과 비료를 구입한 무역업자가 양곡과 비료의 국내 판매가격을 얼마로 하는가였다. 정부의 사정가격과 시장가격의 차이가 크다면 무역업자는 특수이익 또는 은패보조금이라고 불리는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된다. 정부는 이러한 점에서 소비자를 위해 국내 판매가격을 적절히 낮추어야만 했다.
우리나라 정부가 중석불 처분요령까지 변경하여 중석을 수출하여 획득한 중석불로 양곡과 비료를 수입할 수 있게 하였지만 그 물자의 처분방법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정부는 임시방편으로 중석불을 불하받은 민간 무역업자로부터 도입물자의 판매가격과 판매방법에 관해 정부지시를 따른다는 각서를 받았지만, 정부의 처분방침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정부가 도입된 양곡과 비료의 처분방침을 처음으로 결정한
이 사건은 당시의 정부가 정책결정에 있어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 정부와 환율협상에 있어 항상 현재 공정환율을 유지하여 환율인상을 가능하면 억제하려는 입장을 견지하여 왔다. 그러나 중석불의 예와 같이 민간에 수입권을 줄 때에는 민간 수입업자의 이익을 환수하려면 시장환율에 근접하는 높은 환율을 적용하여야 하지만 이것은 늘 우리나라 정부의 공식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정부가 낮은 공정환율을 유지함으로써 발생한 수입업자의 이익을 환수하기 위해 시장질서를 왜곡시키는 정부의 통제가격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기구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자유시장가격에서 무역업자 폭리를 방치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이와 같이 정부는 민간의 외환 보유와 사용을 엄격히 통제하였지만 정작 정부의 외환의 보유와 사용에 대한 감시는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韓國開發院 ,《韓國經濟半世紀政策資料集》, 1995
韓國銀行 ,《韓國의 金融·經濟年表(1945~2000)》, 2000
한국은행 ,《우리나라의 외환제도와 외환시장》,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