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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

국립중앙극장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국립극장직제」대통령령 제 195호
배경

1950년 민족예술의 발전을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극장으로 정식 명칭은 중앙국립극장이며,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있다. 순수 무대 예술만을 사업 대상으로 삼고 자체 공연, 대관사업, 시상제도의 실시, 연극연기자와 전통예술 계승자 양성, 무대예술에 관한 조사·연구, 무대예술의 보급 선전과국제문화교류사업 등을 주된 목표로 하고 있다.

내용

1. 1940년대-국립극장의 설립
국립극장 설치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46년부터였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1948년정부수립 이후부터 국립극장 설립운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1949년 10월에 문교부에서 국립극장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초대 국립극장장에 유치진(柳致眞)을 임명하였다. 그 해 말에 국립극장으로 1,997석의 구 부민관(府民館) 건물이 확정되었고, 1950년 1월에는 전속극단으로 신극협의회(新劇協議會: 약칭 新協)가 창립되었으며, 전부터 있던 극협(劇協)과 함께 두 개의 전속극단을 갖게 되었다. 그 해 5월 허석(許碩)이 연출한 유치진의<원술랑>으로 개관공연을 가져 6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였다. 이어서 교향악단·무용단·오페라단·국극단까지 전속으로 포용하여 국립극장은 명실공히 공연예술의 요람이 되었다. 그러나 제3회 공연 준비 중에 한국전쟁을 만나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1953년 초에 서항석(徐恒錫)이 제2대 극장장으로 임명되면서 대구의 문화극장이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고 윤백남(尹白南)의 〈야화 夜花〉를 재개관공연으로 올렸다. 그러나 전속극단이던 신협이 사설극단으로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기획공연은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재정도 말이 아니어서 자체 공연도 갖지 못하고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아주 작은 재정 지원을 공연 수익으로 메우기 위해 상업주의를 추구하다 보니 흥행극장으로 전락해 갔고, 대구지역에서 수익을 올리지도 못한 채 국립극장의 이미지만 흐려졌다.


2. 1950년대- 국립극장의 재정비
1957년 6월에 서울로 환도한 국립극장은 명동에 있는 1,180석의 시공관(市公館)을 국립극장으로 정하고 재정비에 나서 신협을 다시 전속극단으로 불러들였으며, 연기인 양성소를 설치하여 신인을 길러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1958년에 신협이 다시 국립극장을 탈퇴했기 때문에 전속극단은 유야무야 되었고 1959년에 민극(民劇)이라는 새 전속극단을 두었다. 그 뒤 4·19혁명과 5·16쿠데타가 잇따라 일어나면서 문교부 소관의 국립극장이 공보부로 이관되었고 설치법도 크게 바뀌었다. 극장건물도 대폭 수리되었고 1962년에는 전속극단으로 국립극단이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국립극단 발족에 이어 국립국극단(國立國劇團)·국립오페라단·국립무용단이 발족되어 그 해 3월 재개관 기념예술제를 열었다. 「국립극장발전5개년계획」을 발표하는 등 의욕에 찬 재출발 의지를 보였으나, 1960년대에는 부족한 예산과 민족예술에 대한 인식 부족, 정책 부재 등의 이유 때문에 대관(貸館)으로 겨우 공연장 구실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공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연중 대부분이 대관극장으로 사용되었고 1957년 6월에 서울로 환도한 국립극장은 명동에 있는 1,180석의 시공관(市公館)을 국립극장으로 정하고 재정비에 나서 신협을 다시 전속극단으로 불러들였으며, 연기인 양성소를 설치하여 신인도 길러냈다. 그러나 1년여 만인 1958년에 신협이 다시 국립극장을 개관한것은 연간 2, 3회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창극(唱劇)을 정립시키기 위한 노력이라든지 극작가 발굴사업은 기록될 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 1970년대-국립극장의 중흥
국립극장은 1970년대에 와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967년부터 정부는 민족문화중흥의 전당으로 장충동 일대에 종합민족문화센터로서의 국립극장 건립에 착수하여 1973년 7월에 완공을 보았다. 신축 국립극장은 대극장이 총면적 2,988.4432㎡, 무대면적 330.58㎡,객석 1,518석, 조명실과 두 개의 분장실·효과실을, 소극장이 총면적 631.4078㎡,무대면적 320.6626㎡,객석 344석, 조명실과 두 개의 분장실·효과실을 갖추고 있고, 그 밖에 여섯 개의 연습실을 갖추고 있었다. 장충동의 새 국립극장으로 이전한 뒤 산하에 국립극단·창극단·무용단·교향악단·오페라단·합창단·발레단·가무단 등 8개 단체를 두었고 1973년 10월 17일에 이재현(李載賢) 작, 허규(許圭) 연출의 〈성웅 이순신〉으로 개관공연을 가졌다. 그리고 8개 전속단체가 대극장·소극장 양쪽에서 번갈아 가며 공연활동을 벌였다. 예산도 과거에 비해서 많이 증액되었고 기구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한 데다 진입로부터 대중과 차단되어 관객 확대가 어려웠으며 국립극장이 문화공보부의 주요 부서가 되다 보니 레퍼토리나 극장운영 전반에 걸쳐 제약받는 한계를 가졌다.


4. 1980년대- 국립극장의 혁신
1977년에는 가무단이 세종문화회관으로, 1981년에는 교향악단이 KBS로 이관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연습실을 공연장으로 만들었고 마당놀이를 위한 야외무대도 만들어서 그만큼 공연 공간의 확충을 꾀했으며, 전통예술의 보존과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국립극장은 민족예술의 산실이 되기에는 여러 가지 난점을 안고 있다. 먼저 예산 부족으로 연중 무휴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홍보가 덜 되어 대중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속단체를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성격이 애매하고 특징이 없었다. 또 마당극 성격의 실험을 많이 하여 맨 처음 국립극장의 특성이라고 할 정통극 위주의 보수성을 잃어가게 되어, 국립극장의 개선책이 많이 논의되었다.


5. 현재
1991년 국립중앙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95년 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였고, 국립중앙극장 분관으로 정동극장을 개관하였다. 우리 나라 유일의 국립극장으로서 40여 년 동안 특히 민족문화발전과 예술성 높은 공연예술을 목표로 산하 7개 단체를 통해 꾸준히 작업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참고자료

문화관광부,《2006 문화정책백서 》, 2006
중앙국립극장,《國立劇場30年》, 1980
류해영,《韓國劇場史》 한길사, 1982

집필자
류정아(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