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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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관제도

주제유형
정책/제도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근거

1929.9.24 개정된조선총독부지방관관제


배경

1920년대 소작문제가 점점 심각해지자 총독부는 1920년대 후반 소작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 마련에 착수하여 1928년 7월 26일 각 도지사에게 응급조치로서 「소작관행 개선에 관한 건」을 통첩하여 소작관행에 대해 행정지도를 명령하고, 이와 함께 1929년 9월부터 일부 지역에서 소작쟁의 조정 및 방지, 소작관행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소작관 제도를 실시하였다.


내용

총독부는 소작관행 개선을 위한 대책의 일환으로 1929년 9월 24일 지방관관제를 개정하고 소작관제도를 실시하였다. 소작에 관한 지도, 감독기관인 소작관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우선 부재지주가 많고, 소작쟁의가 빈발하던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등 5개 도에 소작관이, 그리고 경기, 충남에는 소작관보가 각각 1명씩 설치되어 소작쟁의 조정 및 방지, 소작관행조사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소작관 설치에 대해 당시 총독부 당국은 소작관행개선 및 쟁의조정에 커다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3년 이전까지는 소작관이 일부 지방 밖에 설치되지 않았고, 더욱이 소작관의 권한에 강제력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1928년 1,590건(참가인원 4,863명), 1929년 423건(5,419명), 1930년 726건(13,012명), 1931년 667건(10,282명)이나 발생하던 소작쟁의나 소작관행개선 대책 등에 효율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무리였다.


1930년 3월 조선의 소작사정을 조사했던 일본의 지방소작관 카지(梶正夫)도 “(조선)소작관의 지위권한은 배경이 없고, 무기도 결여되어 내지(일본…필자) 부현(府縣)의 소작관에 비해 더욱 곤란하다”고 보고하면서, 소작관제도가 원만하게 운용되기 위해 ① 총독부에 소작관을 설치하여 각도의 소작관을 지도하고 연락을 취할 것, ② 소작관 미설치 지역에 조속히 소작관을 설치할 것, ③ 소작관계가 중요시되는 각 군에 소작관보를 설치할 것, ④ 각도의 소작사무 직원을 증원하여 최소한 소작관 1명, 소작관보 1명, 고용인 1명으로 할 것, ⑤ 소작관의 직무상 그 목적 수행에 부합되는 정신적, 물질적 대우를 할 것, ⑥ 각도 소작사무설비를 개선할 것, ⑦ 소작법, 소작조정법을 실시할 것 등을 제안하였다.


1933년부터 소작관 및 소작관보 배치가 30명 이상으로 크게 늘어났고,「조선소작령」,「조선농지령」의 실시로 그들의 직무 권한도 점차 늘어나, 소작관은 소작조정에 대해 재판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진술할 수 있고, 재판소는 필요할 때 소작관에게 사실 조사를 촉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재판소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소작관에게 의견을 구할 수 있고, 소작관은 소작위원회에 출석하여 의견을 진술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1933~39년에 소작관 또는 소작관보에 의한 조정은 전체 소작쟁의 조정 가운데 0.3%에 불과할 정도로 그 역할은 매우 작았다. 오히려 군·읍·면직원 및 경찰관이 적극적으로 소작쟁의에 개입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소작쟁의의 확산을 우려한 조선총독부가 지방행정기관과 경찰권력을 통해 소작쟁의를 신속하게 처리하여 농촌치안을 유지하려는 의도에 기인하는 것으로, 일본의 소작관제도가 소작쟁의 및 소작업무에서 큰 역할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참고자료

吉田正廣,《朝鮮に於ける小作に關する基本法規の解說》, 1934

農務省農務局,朝鮮及臺灣ニ於ケル小作事情》, 1937

小早川.九郞,《朝鮮農業發達史 政策篇》, 1944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 농업·농촌 100년사》상, 농림부, 2003


집필자
배민식(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