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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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대가뭄과 식량부족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하위주제
  • 주제설명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일반적으로 5월 중순경부터 중국 양자강 유역에서 저기압이 발달하여 한반도에 비를 뿌리는데 1939년에는 양자강 유역의 저기압 발생이 극히 적어 전국적으로 강수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경기 이남지방은 4월부터 7월까지의 총강우량이 예년의 1/3~1/2 수준인 200~350㎜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가뭄으로 기온도 크게 상승하여 중남부 지방에서는 최고 기온이 30도 이상인 날이 평년의 2~3배에 달하였다. 이와 같은 이상 기후로 1939년 농업생산은 큰 타격을 받아 미증유의 흉년을 기록하였다.

내용


1939년 대가뭄으로 수도작의 경우 식부예정면적 122만7천정보의 58%에 해당하는 70만9천정보가 피해를 당했다. 피해면적 가운데 식부 불능이 62.4%나 되었고, 그 외 수확 전무(고사한 것)가 12.8%, 70% 이상 감수가 24.7%였다. 이와 같은 가뭄 피해로 쌀 수확량은 전년에 비해 46%나 감소(약 900만석 감소)한 785만3천석에 불과하였다. 특히 경북, 전북, 충남, 충북 등의 피해가 심해 이들 지역의 수확량은 평년에 비해 경북은 27%, 전북은 29%, 충남은 30%, 충북은 36%에 불과하였고, 전북 부안군과 옥구군은 수확량이 각각 평년의 7%와 8%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1924년과 28년에도 가뭄이 있었는데 당시 논의 피해면적이 각각 13만5천여정보, 21만4천여정보였고, 그로 인한 쌀 생산량 감소가 각각 237만6천석, 200만6천석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1939년의 대가뭄 피해가 어느 정도 심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밭작물도 가뭄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육도와 대두의 피해가 가장 컸다. 육도의 경우 재배면적이 적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주요 밭작물 중의 하나인 대두는 전남만 약간 생산이 증가하였을 뿐 다른 지역은 파종 시기의 지연, 발아 불량, 발아 후 고사 등으로 생산이 큰 폭으로 감소하여 농가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그나마 주요 식량인 맥류와 좁쌀은 전년도에 비해 오히려 생산이 늘어나 가뭄으로 인한 식량 문제를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좁쌀의 경우 지역별로 차이가 있어 경기, 충북은 전년도에 비해 생산량이 1/3~1/2 정도로 크게 감소하여 이들 지역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면화의 경우도 전체적으로 전년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가뭄과 그로 인한 병충해로 충북 25%, 충남 33%, 전북 13%, 경북 24%나 수확량이 감소하였다.

총독부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당시 경기이남 8개도의 미작농가 194만5천호 가운데 가뭄피해를 입은 이재농가는 118만2천호로 전체 미작농가의 60%에 달하였다. 특히 벼의 식부율이 가장 낮았던 경북과 전북은 이재농가가 각각 80%, 95%나 되었다. 그런데 수확의 70% 이상 피해를 입었을 경우에만 이재농가로 인정하였으므로 피해가 수확의 70% 미만인 농가도 포함시키면 경기이남 미작농가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가뭄으로 인한 피해는 지주, 자작농, 소작농 할 것 없이 모든 농민이 당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소작농민, 농업노동자 등 영세민에게 치명적이었다. 이들은 가뭄으로 벼의 식부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식부가 이루어진 경우도 그 후 말라죽어 농업임노동의 기회가 급격히 줄어들어 노동수입 확보가 어려워졌고, 또한 가을 수확을 담보로 식량을 빌릴 수도 없게 되어 상당수의 농가가 식량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사실 봄의 보리 수확기와 가을 쌀 수확기 전에는 식량이 크게 부족하여 매년 많은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30년 조사에 따르면 전체 농민의 약 48%, 그리고 소작인의 68%가 춘궁민이었다. 그러므로 큰 가뭄이라도 발생하면 영세소농의 생활은 더욱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었다. 1939년 8월경부터 식량이 부족해진 농가가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밀이나 보리의 껍질 또는 기울에 소량의 곡류를 섞어 먹거나, 소량의 밀, 도토리, 칡뿌리 등의 가루에 야채나 해초 등을 섞어 죽 등을 만들어 먹어 공복을 면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곡류는 물론이고 겨, 기울, 나물조차 없어 그야말로 기아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소작농민과 농업노동자들의 생활이 이처럼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되자 농촌을 떠나 유랑하거나 도회지로 몰려들어 결국 걸식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이들 가운데에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총독부는 이와 같은 참담한 가뭄 피해 농민들에 대해 ① 외지 노동 취업 알선, ② 만주개척민 알선, ③ 부업장려, ④ 노임 살포 공사 실시, ⑤ 종곡 대부 등과 같은 몇 가지 구제대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들을 볼 때 총독부의 대책에 피해 농민의 구호와 피해 시설의 복구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첫째, 위와 같이 총독부는 몇 가지 구제대책을 내놓았으나 '모든 것을 관이 구제하는 것은 쓸데없이 의뢰심을 조장하고 자력갱생의 정신을 몰각하는 결과를 초래' 한다하여 총독부에 의한 적극적인 구호 대책보다는 '자력에 의한 분기 및 지주 또는 인보상조' 에 의한 구제와 황국신민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정신지도를 가뭄대책의 근본 방침으로 제시하고,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의 애국반을 동원하여 정신지도와 구제활동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둘째, 이재민의 외지 노동 취업 알선과 만주 개척민 알선을 이재민 대책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전시 노동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던 총독부가 구호대책을 이용하여 이재민을 지방 및 일본의 각종 국책사업, 광산 등에 노동 취업을 알선하고 또 북선 및 만주개척민으로 우선적으로 이주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와 같은 농업노동력의 반출은 신체 건장한 청장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농업노동력의 양적 감소뿐만 아니라 질적 저하도 초래하여 오히려 농업 생산력 복구에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셋째, 노임살포공사에 동원되었을 때 받는 노임도 동절기를 대비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최소한도의 소요 생활비인 1일 40전 이상은 지불하지 않고 나머지는 강제 저금하도록 하여 읍면장 등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역사적의의

1939년 미증유의 대가뭄으로 조선은 물론 전시식량 확보에 혈안이 되어있던 일본도 식량수급에 큰 타격을 받았고, 이로 인해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 다시 대규모의 미곡증산정책을 실시하고, 전시식량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참고자료


《朝鮮農會報》, 1939. 11

朝鮮總督府司正局社會課,《昭和十四年旱害誌》, 1943

한국농촌경제연구원,《한국 농업·농촌 100년사》(상), 농림부, 2003


집필자
배민식(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