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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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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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농지제도란 농지의 소유, 이용 및 임대차, 전용, 조성 및 정비, 보전 등의 이념과 방향 및 수단 등에 관한 법으로 정해놓은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농지의 소유와 이용·임대차·전용·보전에 관한 규정이 농지제도의 핵심을 이루는데, 이는 일시에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지난 100여년에 걸쳐 형성·변화되었다. 그 변화·발전 과정을 5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근대적 토지소유제도의 확립
근대 이전에도 사적 토지소유가 지배적이었지만 소유권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미비하였다. 토지 매매 문기를 관에 제출하여 승인받는 ‘입안(立案)’은 일반 농민들이 이용하기 어렵고 오히려 궁방이나 권세가들이 농민들의 개간지 등을 침탈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으며, 사문기(私文記)는 위조, 변조, 절도 등을 방지하기 어려워 어느 것이나 토지소유권을 보증하는 제도로서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토지등록대장에 해당하는 양안(量案)은 조세부과를 위한 공부(公簿)였으며, 양전(量田)사업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아 양안으로써는 토지소유자 등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1898년 7월부터 대한제국 정부는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토지소유자 및 지세액과 납세자 등을 파악하고자 하였으며, 1902년 3월부터 소유권 증명에 해당되는 지계의 발급을 포함하는 양전사업을 실시하였으나, 러ㆍ일전쟁과 일본군의 진주에 의해 양전사업이 중단되었다. 당시 행정구역 13도 9부 1목 331군 중 평남ㆍ평북ㆍ함남ㆍ함북을 제외한 9개 도의 2부 216군에서 양전사업이 완료되고, 7부 1목 115군에서 양전이 실시되지 않은 채 중단된 것이다. 


이후 일제는 1910~1918년에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임야를 제외한 모든 토지를 대상으로 ①토지소유권, ②토지가격, ③토지의 지형ㆍ지모 등을 조사하고 등기제도 등을 도입하였다. 이리하여 궁방전ㆍ역둔토 등이 국유지로 사정됨으로써 국가의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폐지되고 정치권력과 토지소유의 결합 관계가 완전 해체되었으며, 민법과 등기제도 등에 의해 배타적ㆍ절대적인 사적 토지소유가 법으로 보장됨으로써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확립되었다.


2.소작조정제도의 도입
근대 이전에도 토지이용제도는 지주ㆍ전호제와 병작반수제 등이 지배적이었으나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확립되고 1920년부터 〈산미증식계획〉이 실시되면서 식민지지주제가 형성·발전되는 반면 자작농 이하 소작농이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작쟁의가 발생하는 한편, 소작인 단체가 결성되고 민족주의ㆍ사회주의 운동이 농촌에 침투한 데 이어 1930년 농업공황 이후 비합법적·혁명적 적색농민조합이 확산되자 일제는 1932년에 「조선소작조정령」을 제정하고, 1934년에 「조선농지령」을 제정하여 행정관서가 소작쟁의를 조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3.자작농체제의 확립
1945년 말 206만호의 농가 중 49%가 순소작농, 35%가 자소작농이었으며, 경지면적 226만 정보 중 64.2%인 145만 정보가 소작지였다. 이리하여 농지개혁이 해방 직후 최우선의 경제적 과제로 제기되어 2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1차 농지개혁은 1948년 4월 미군정이 실시한 귀속농지 매각 조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제2차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1950년에 실시되었다. 귀속농지 매각에 의해 논 202,693정보와 밭 65,083정보 등 합계 267,776정보가 분배되었으며, 농지개혁에 의해 논 215,266정보와 밭 101,595정보 등 합계 316,862정보가 분배되었다. 제1차 및 2차 농지개혁을 통해 논 417,959정보와 밭 166,678정보 등 합계 584,638정보가 분배되었던 것이다. 이 면적은 1945년 말의 소작지 면적 1,447천 정보(귀속농지 273천 정보와 일반농지 1,174천 정보)의 40.4%에 해당된다. 귀속농지는 모두 매각ㆍ분배된 반면 일반농지의 소작지 중 714천 정보(소작지 총면적 1,447천 정보의 49.2%)가 농지개혁이 지연되는 동안 지주에 의해 처분되었던 것이다. 어떻든 농지분배가 완료된 1951년 말에 소작지는 158천 정보(전체 농지면적 1,958천 정보의 8.1%)로 줄었다. 농지개혁을 계기로 하여 식민지지주제가 해체되고 자작농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4. 농지보전제도의 도입
농지보전제도는 1972년 12월에 제정된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해 비롯되었다. 이로써 도시계획구역 밖의 농지에 한해 농지전용허가제가 도입되고, 공공투자에 의해 시행된 농지개량사업지구 내 농지의 전용에 대해 농지조성비제도가 도입되었다. 


농지보전제도는 1975년 12월 이 법의 전면 개정에 의해 정비되었다. 


그 핵심 내용은 ①농지를 절대농지ㆍ상대농지로 구분하여 절대농지를 법에 의해 지정·고시하며, ②일정면적 이상 절대농지의 전용을 허가하려면 국무회의의 심의를 받고, ③절대농지를 전용할 경우 전용면적 상당의 농지조성을 하거나 조성비용을 납부하도록 한 것 등이다. 그 외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의 협의·승인 또는 허가 없이는 논과 경사 15% 이하의 밭에 다년성식물ㆍ목초ㆍ관상수를 재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어 1981년에는 농지조성비를 재원으로 한 농지기금의 신설, 농업진흥공사의 농지기금 운용·관리 및 대체농지 조성, 상대농지에도 농지조성비 부과 등의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농지보전제도는 1990년「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의 제정에 의해 절대농지ㆍ상대농지 지정에 의한 필지별 농지보전제도에서 농업진흥지역 지정에 의한 권역별 농지보전제도로 변경되었다.


5. 농지제도의 일원화ㆍ체계화
1994년 「농지법」이 제정됨으로써 농지제도는 일원화ㆍ체계화되었다. 이 법의 제정에 의해 「농지개혁법」(1949), 「농지개혁사업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1968), 「농지의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1972), 「농지임대차관리법」(1986), 「지력증진법」(1969) 등이 폐지되고,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1990)의 농업법인제도ㆍ농업진흥지역제도ㆍ농지전용신고ㆍ농지전용부담금ㆍ농지소유상한특례 등이「농지법」에 이관됨으로써 농지에 관한 법령이 「농지법」으로 일원화된 것이다. 


또한 이 법에 의해 농지제도의 내용이 체계화되었다. 헌법에 규정된 경자유전 원칙을 기본이념으로 하여 농업인과 농업법인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고, 농지의 위탁경영과 임대차는 금지하며, 집단화된 우량농지를 농업진흥지역으로 지정ㆍ보전하고 농지전용은 허가를 받아 농지보전부담금을 납부한 후 하도록 한 것이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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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박석두(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