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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중국(1993-1997)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중 국교 수립, ·중 양국간 경제·통상 교류 격증

배경

1992년 한·중 수교는 반세기 동안 막혀있었던 양국간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민 교류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가 비약적으로 전개되었다

내용

1992년 한·중 수교는 반세기 동안 막혀있었던 양국간 교류와 협력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민 교류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가 비약적으로 전개되었다.

수교 이후 가장 현저한 발전을 보인 분야는 경제·통상 및 양국 국민간 상호 왕래 등 실질 분야에서의 교류였다. 1989년 소규모의 간접 교역으로 시작된 양국간 교역은 교역 총액 면에서 수교 직전인 1991 44억 달러에서 수교 5년 후인 1997년에는 약 240억 달러에 육박하여 5배 이상 증가하는 놀라운 성정을 보였다. 이로써 한·중 양국은 각각 상호 제3위의 교역 상대국이 되었다.

 

교역과 함께 양국간 경제·통상관계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투자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수교 직전인 1991년 말 당시 1억 달러가 안되었던 한국의 중국에 대한 투자는 수교 후 6년여가 지난 1998년 말 현재 약 64억 달러에 달해 100배 가까이 증가하는 놀라운 신장세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에 이어 한국의 제2의 투자 대상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양국 간의 경제·통상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경제·통상은 물론 각종 목적으로 상대국을 방문하는 양국 국민들의 숫자도 크게 증가하였다. 수교 첫해인 1992년에 8 8,000여 명에서 1998년에는 60만명에 육박할 만큼 획기적으로 증가하였다.

 

수교 이후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였고, 중국에서도 장쩌민 국가주석, 리펑 국무원 총리 등이 한국을 방문하였다. 양국 간에 정상 상호 교류를 통한 정치·외교 관계의 발전이 도모되었고, 동시에 북한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협조체제가 구축되어갔다. 수교 이후 양국은 황장엽 사건이나 타이완의 핵폐기물 북한 이전 문제 등 구체적인 계기를 통해 상호 긴밀히 협조하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었다. 또한 1997년부터 시작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4자회담에서도 지속적인 협조체제를 구축해갔다.

참고자료

외교통상부,『한국외교 50, 1948-1998, 1999
김정원,『한국외교발전론』집문당, 1996

집필자
전상숙(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