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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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망명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북한 권력의 핵심에서 활동하던 황장엽은 1997년 2월 12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 김일성김정일의 최측근 인사였으며, 북한 주체사상의 주요 설계자로 알려져 있던 황장엽이 북한을 탈출함으로써 북한 사회의 안정성과 내부 정보에 대한 많은 의혹과 관심이 집중되었다.


내용

황장엽은 그동안 탈북한 인사 중 최고위층에 해당하며 북한 권력의 심장부에서 활동하던 인물이다. 1922년생으로 탈북당시 75세였던 황장엽은 김일성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활동했는데, 당시 주요한 임무는 이 대학 학생이던 김정일을 교육시키는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1965년 김일성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972년 이후 11년 동안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활동하였는데, 1984년 조선노동당 국제담당비서와 1993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함으로써 당과 정부의 핵심인사가 되었다. 더불어 황장엽은 1979년 주체사상연구소 소장을 역임하고 1995년에는 국제주체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황장엽은 특히 1960년대 중반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김일성이 북한의 핵심 통치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설계할 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황장엽은 김일성과의 특별한 친분으로 북한 내에서 중요인사가 되었고, 따라서 다른 북한 주민들과는 달리 활동에 상당한 자유가 있었다. 그는 북한 정권이념의 주요설계자이자, 국제문제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상대적으로 외국여행을 다니기가 용이했으며, 외국 인사들과 많은 접촉을 가지고 했는데, 이러한 그의 특별한 지위가 망명을 하는데 좋은 환경으로 작용했다.

 

특히 1994 7월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에는 베이징에 무역회사를 설립하는 것을 도우며 외화벌이를 위해서 노력했다. 이 회사는 황장엽과 함께 탈출한 김덕홍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당시 황장엽은 이 과정에서 한국의 사업가, 목사 등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북한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 황장엽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 정권하에서 북한 군부로의 권력이동이 매우 위험스럽게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며 북한내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크게 상승하며 자신의 입지가 점점 더 약화되어 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일례로 황장엽은 1996년 3월 10 북한 로동신문에 실린 기회주의자에 대한 비판 기사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당시 그에 대한 감시가 증가했으며, 그의 언사와 행동에 대한 비판이 집중되어 그의 권위가 계속 약화되고 있었으며, 곧 권력의 핵심부에서 축출될 가능성을 인지하고 남한으로 망명하였다.


 당시 황장엽의 망명은 중국정부에 상당한 어려움을 던져 주었다. 당시 남북한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했던 중국으로서는 황장엽이 납치되었다고 북한이 주장하자 상당히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후 북한이 황장엽의 한국행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이후에도 중국 정부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여 황장엽을 5주 동안이나 한국영사관에 묶어 두었으며, 중국에서 한국으로 바로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제3국을 통해서 가도록 했다. 당시 필리핀이 한국 정부와의 조율을 통해 임시 은신처를 제공하였으며, 망명을 시도한지 2개월 이상 지난 4 20일에야 황장엽은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사적의의


참고자료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 《두개의 한국》 길산, 2003

황장엽,《나는 역사의 진실을 보았다》 한울, 1999

황장엽,《개인의 생명보다 귀중한 민족의 생명》 시대정신, 1999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2. 0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