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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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선언(1992. 1.)

주제유형
정책/제도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근거

1970년대 초 미국은 아시아본토 방위에서 미군을 철군하고 아시아 국가들에게 이를 맡긴다는 닉슨독트린을 적용하였고 한국에서 한국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 2만명을 철수시켰다. 그 후 동아시아 국제정세에서 공산세력은 크게 확장하였고 1975년 4월 베트남이 공산화되었고 한반도 주변정세가 크게 긴장상태에 빠지게 됨에 따라서 한·미 양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하기로 하고 1976년 6월 처음으로 한·미 양국간의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작되었다.


배경

팀스피리트의 전신은 미군의 공수훈련 중 한·미양국이 공동작전 훈련을 실시한 1969년 3월의 포커스레티나(Focus Retina) 작전을 들 수 있다. 이 훈련은 한·미 양국의 대공방위태세를 점검하고 신속한 기동력과 전력을 과시한 훈련으로 완전무장한 2500명 병력을 투입한 훈련이었다.


1976년 6월의 첫 훈련에서는 한·미양국군 4만6천여 명이 훈련에 참가하였고 1977년부터 카터행정부의 주한미군 철군정책이 수립되었지만 양국간의 팀스피리트 훈련은 1977년과 1978년에도 계속 실시되었고 1978년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매년 연례적으로 실시하기로 합의되었다.


이와 같이 팀스피리트 훈련은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한국군의 방어력을 보완할 필요가 발생하여 한미 양 동맹국가 사이에 공동방어와 군사협력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하여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1976년 이래 한국의 팀스피리트 훈련을 북한을 침범하기 위한 핵전쟁 연습이라고 비난하고 이를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북한은 팀스피리트 훈련동안 남북대화를 거부하였고 한국이 동 훈련을 받는 시기동안 준전시상태 명령을 발동하여 대응하였다.


내용

1990년대 초에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하여 한반도를 둘러싼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한·미 양국간의 팀스피리트훈련은 중요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국방부는 1991년 12월 16일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의「핵안전 협정」에 서명하고 핵감찰에 응한 뒤 남북한 동시 핵사찰을 받아들이면 팀스피리트 훈련을 유보내지 전면 재조정할 수 있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1984년 이후 20만명 이상이 참가한 상태에서 매년 치러진 동 훈련에 대해 1992년 처음으로 잠정적 중단 선언조치가 이루어졌다.


1991년말 한국정부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을 수용하여야 하며 아울러〈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한국측이 제시하는 시범사찰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팀스피리트 중단조건을 제시하였다. 이런 한국측의 제안에 대하여 북한은 12월 26일 한국과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에 합의하고 연말 12월 31일에 최종 합의해 남북한 양국은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미국은 남북한 간의 비핵화선언을 환영하면서 침스피리트훈련 취소에 대해 협조할 것을 밝혔다. 이리하여 한국에서 실시될 예정이었던 1992년 봄의 팀스피리트 훈련은 취소되었고 북한은 1992년 4월에 최고인민회의에서 IAEA의 핵안전 협정을 비준, 동의하였고 IAEA의 북한핵 사찰이 1992년 6월부터 실시되게 되었다.


참고자료

이춘근,〈팀스피리트훈련과 남북한관계〉《통일문제연구》(4권4호) 평화문제연구소, 1992.12
돈 오버도퍼,〈두개의 코리아〉《중앙일보사》, 1998
김용직,〈사료로 본 한국의정치와 외교: 1945∼1979〉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