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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5공시기 한일경협차관 도입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한국이 일본의 안전보장에 막대한 기여를 해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일본으로부터 대량의 경협차관을 도입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해방 후 한국이 일본의 방위에 결정적 기여를 해왔으니 일본은 응당 한국에 경제협력 차관을 제공해야 한다는 논리로 일본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소위 이것이 5공 시대 대일 안보경협차관 교섭이다. 애초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정부에게 이러한 안보경협차관을 요구했을 때, 일본은 안보와 경제문제를 연결시키는 한국 측의 논리에 대해서 거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때마침 도래한 신 냉전체제 상황과 한일경협의 전략적 의미를 평가하는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일본도 한국정부의 요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배경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직후인 1981년 미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대일 안보경협 요구의 정당성을 미 측에 설득하여 레이건 대통령의 긍정적 반응을 획득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 정부는 일본에게 100억불 경협차관의 제공을 요구하였다. 변화하는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이 공산권과의 대결에서 군사적 전초기지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안보와 연관된 경제협력은 국내정치상 곤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경협차관 교섭은 1983년 1월 나카소네 수상의 방한으로 최종 결착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2년간의 기간 동안 진행되게 된다.

내용

본격적인 교섭은 1981년 8월부터 진행되었다. 한국은 최초 60억불 정부차관과 40억불의 민간차관을 일본에게 요구하면서 이는 안보를 위한 경협차관이 되어야 한다고 그 성격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정부의 대외차관 협상은 기존의 외국과의 차관협상의 틀 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경제협력을 안보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일본정부로서는 만약 한국에 협력차관을 제공한다면 종합안전보장 정책의 일환으로 검토할 수 있으며 그 경우에도 한국의〈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지원하는 경제원조의 형태에 한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일본의 강경한 입장에 대해서 한국은 경협차관의 논리를 수정하였다. 


즉 더 이상 안보연관의 대일차관을 요구하지 않고 순수한 경제적 의미의 원조를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안보경협을 둘러싼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일 양국은 감정적인 대립이 격화되고 한국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때마침 스즈키 수상의 뒤를 이어 집권한 나카소네 수상은 한국과의 경협차관 교섭에 종지부를 찍는 결단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나카소네 수상은 1983년 전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열고 40억불에 이르는 경협차관을 제공키로 최종 결정하였다. 나카소네의 이러한 결정 배후에는 한일관계의 악화와 이완을 경계하는 미국의 전략적 입장이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나카소네의 수상의 결단이 이루어진 데는 악화된 한일관계의 수복을 통해 대미관계에서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전략적 발상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자료

하영선 편,《한국과 일본: 새로운 만남을 위한 역사인식》나남출판, 1997
이숙종 편,《전환기의 한일관계》세종연구소, 2002
영작·이원덕 편,《한국에게 일본은 무엇인가?》한울, 2006
최상용·이면우·이원덕 저, 『탈냉전기 한일관계의 쟁점』집문당, 1999
이상우,《제3공화국 외교비사》《조선일보사》, 1985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