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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박정희-카터 정상회담

주제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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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내용
조지아 주지사 출신 지미 카터의 등장은 미국외교의 일대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카터는 서민 이미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한반도에 대해 인권외교와 철군정책을 추진하였다. 유신 이후 긴장관계를 형성했던 한미관계는 카터-박정희 시기 심각한 갈등을 불러왔다. .
카터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 직후부터 주한미군 철군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1977년 1월 밴스 미 국무장관이 주한 미지상군 철수 방식에 관한 검토를 지시하였고, 2월 15일 카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서한을 보내 철군과 인권문제를 거론하였다. 박대통령은 답신을 통해 한국에는 정치범이 없으며, 한국의 심각한 안보상황에 대한 카터의 이해를 촉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카터 대통령은 1979년 6월 29일 한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미국은 회담에서 〈남북미 3자회담〉안을 철회한 대신, 한국의 인권상황 개선과 한국의 방위비 증가를 요구했다. 한국은 미국에게 주한미군 철수 동결을 주장했다. 박정희와 카터의 단독회담은 철군과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감정대립이 격화되어, 〈한·미 정상회담〉 중 ‘최악의 정상회담’으로 알려지게 된다.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은 미중관계의 정상화, 일중 평화우호조약의 조인을 환영하고, 미국이 태평양국가의 일원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지속적 노력을 펼칠 것을 밝히고 있다. 카터 대통령은 한미 양국 사이의 우호와 협력의 강한 유대에 신뢰를 표시하고, 미국이 한국의 평화·안정의 유지 및 경제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 지지할 것을 천명했다. 〈정상회담〉 직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철군계획〉 철회를 강력히 요청하고, 밴스 국무장관, 브라운 국방장관이 이에 동조하여 카터는 철군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김계원 비서실장과 글라이스틴 대사와의 면담에서 한국은 방위비 지출을 GDP 6%선으로 인상하고, 인권문제 개선과 민주화 조치를 약속했다. 카터 대통령은 미 2사단과 연합사령부 계속 주둔 요구에 대한 만족할만한 결실을 약속했다.〈정상회담〉이 끝난 후 박정희 정부는 180명의 정치범 석방을 발표했고,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주한미군 철수의 사실상 동결을 워싱턴에서 발표했다.
참고자료
Don Oberdorfer〈The Two Koreas〉《Basic Books》, 1997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