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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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월한국군 철수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박정희 정부 등장 이후 한국은 미국이 수행하는 베트남전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기를 희망하였다. 존슨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베트남문제에 개입하기로 결정하고, 많은 동맹국들의 지원을 요청하자 한국은 태권도 교관, 이동외과병원 파견을 시작으로 점차 공병부대와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하기에 이른다. 주월파병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은 동맹으로서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미국은 닉슨 대통령의 취임과 더불어 베트남에서 손을 떼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도 베트남 파병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내용

미국 내에서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닉슨은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 이후 베트남에서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다. 반전여론의 악화, 인플레와 재정적자에 직면한 닉슨의 구상은 아시아 주둔 미군의 대폭적인 감축과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베트남전쟁의 종결이었다. 닉슨은 1969년 7월 25일 ‘괌독트린’이라고 알려진 미국의 새로운 아시아 정책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조약상의 의무를 준수하지만 강대국의 핵 위협을 제외하고 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방위의 일차적인 책임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닉슨은 월남전을 월남인들에게 맡기고 미국은 뒤에서 군수지원만 하면서 미군 전투 병력을 철수시키는 ‘월남화 정책’으로 알려진 미군병력철수를 1969년 7월부터 시작하였다.


미국이 병력 철수를 개시하자 전투부대를 파월한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및 태국 등 연합국도 이에 동조하여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하였으며, 1972년 초에는 각각 100명 이내 상징적 병력만 잔류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한국에서도 국회를 중심으로 한국군 철수문제가 제기 되었으나, 1970년 11월 미국을 방문했던 최규하 외무부 장관은 “현시점에서 한국군은 철수를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발표하는 등 한국 정부는 동년 12월 초까지 철군문제를 표면에 내놓지 않고 있었다.


당시 정부가 한국군의 철수를 서두르지 않았던 것은 주한 미군 철수문제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가 주한 미군의 감축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으며, 미국에게 한국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이 지원하는 장비의 내용, 감축 후 잔류 미군의 계속 주둔, 북한 남침 시 즉각적인 미군의 지원 등에 대한 확약을 요구했다. 그러나 1970년 닉슨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한 애그뉴 부통령은 자신이 추가 감축 여부를 보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예산상의 제약 때문에 군사원조 내용도 공표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의 동의 없이 미 제7사단 제1여단 사령부 폐쇄를 발표하였으며 결국 한국정부는 1971년 2월 한국군 현대화와 주한 미군 감축에 대한 제반조치에 관한 공동성명에 동의해야 했다.


한편 미국은 1971년 3월 미 제7사단의 철수를 완료하였고 전방에 있던 2사단도 후방으로 빠져 휴전 18년 만에 판문점을 제외한 휴전선 전 지역이 한국군 관할 아래로 들어왔다. 닉슨 독트린에 따른 주한 미군 감축이 일단락되었다. 주한 미군을 철수시킬 경우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조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있는 동안 주한 미군 철수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빗나간 상황에서 한국 정부도 더 이상 주월 한국군의 철수를 미룰 명분이 없었다. 박대통령은 1971년 1월 연두기자회견에서 주월 한국군의 철수 가능성을 표명했으며, 이후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정부는 미국 및 남베트남 정부와 협의를 거쳐 1971년 11월 한국군 제1단계 철수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은 원칙적으로 단계적 철수에 동의하지만 그 시기는 주월 미군의 감축계획과 남베트남군으로의 임무이양에 맞춰져야 한다는 입장이던 반면, 남베트남 정부는 철수 보류를 요청했다.


또한 한국은 미군이 제공했던 장비를 최대한 보유한 상태에서 철군을 원했지만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에게 이양하려는 것이었다. 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했던 장비의 소유권과 철수비용, 국내에서의 운용방안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은 12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제1단계 철수부대로 제2해병여단과 해군수송전대 및 지원부대 일부병력 등 1만 명을 7개 제대로 편성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 1일부터 1972년 4월 13일까지 해상으로 철수시켰다.


제2단계 철군에 대해서 정부는 1972년 말까지 잔여 한국군을 모두 철수시키겠다는 방침을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에 통보했으나 미군은 철수시기를 1972년 말 이후로 연기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남베트남 정부는 1973년 말까지 계속 주둔해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는 1973년까지 잔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결과 1972년 말 기준으로 남베트남에 파병한 연합군 중 가장 많은 병력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있었다.


한편 1972년 9월이 되면서 베트남 평화협상이 빠른 속도로 진척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이 지상군을 철수하고 공군력만으로 남베트남군의 작전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 역시 한국군대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외국군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파리 평화회담〉이 본격화되자 11월 주월한국군사령부는 1973년 6월 말까지 철수한다는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휴전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철수한다는 계획을 예하부대에 하달했다. 1973년 1월 베트남 평화협정이 조인되고 발효됨에 따라 남베트남에 파병된 외국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한국군은 1973년 1월말 선발대를 시작으로 3월말에 후발대가 복귀함으로써 8년 6개월 동안 베트남전쟁에 파병되었던 한국군의 철수가 완료됐다.


참고자료

국방부,《베트남전쟁과 한국군》, 2003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