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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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참전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했다. 10월 중순에는 이미 서부지역에서 유엔군은 청천강 지역까지 도달했다. 동부 전선에서 국군은 원산과 함흥을 장악했고 미 제10군단은 원산에 상륙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이 되는 11월말까지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이처럼 전쟁 조기종결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을 때 중국은 10월 19일 밤 대규모 중공군을 압록강을 건너 북한 지역으로 투입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김일성에게 모택동과 반드시 전쟁에 관해 사전에 협의하도록 했다. 1950년 5월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모택동은 만약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북한이 위기에 처한다면 북한을 위해 중국이 개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오자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즉시 중공군을 참전시킬 것을 요구했다. 


소련의 공군력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공군의 참전을 주저하던 모택동은 전쟁 이전의 약속대로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내용
10월 중순 전쟁의 주도권을 완전 장악한 유엔군과 국군은 중국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는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참전할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10월 중순 26만명이라는 대군을 북한 지역으로 투입했다. 중국은 참전 후 6차에 걸친 대공세를 펼쳤다. 10월말 중국은 유엔군에 대해 제1차 대공세를 펼쳤다. 그리고 11월 6일 다시 썰물처럼 사라졌다. 제1차 대공세에서 잡힌 중공군 포로들을 심문했지만 미국은 대규모 중공군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11월 25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제2차 대공세에 의해 유엔군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계속된 중공군 제3차 대공세의 결과 유엔군은 다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어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직면하여 맥아더장군은 와싱톤에 만주폭격을 허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트루먼행정부는 미국의 만주폭격이 전쟁의 범위를 확대시킬 것을 우려하여 만주폭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트루먼대통령과 맥아더장군은 전쟁 방식을 두고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51년 맥아더장군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역사적의의
1950년 12월말 미 제8군사령관 워커장군은 비극적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를 대신하여 리지웨이 장군이 지휘권을 이양받았다. 맥아더 해임 이후 리지웨이는 유엔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중공군의 계속된 대공세를 잘 막아내고 전선을 38선 근처에 고착시키고 서울을 재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중공군의 계속된 대공세로 인하여 중공군의 보급선이 매우 길어졌다. 또한 만주에서 38선까지 이르는 공산세력의 보급선은 유엔군의 우세한 공군력에 의해 쉽게 파괴될 수 있었다. 미국은 맥아더가 주장한대로 만주를 직접 폭격하지 않고서도 한반도 내부에서 중공군의 병력 이동과 보급을 차단시킬 수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저항에 직면하여 중공군은 더 이상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1951년 5월 16일부터 23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제6차 대공세를 마지막으로 중공군의 공세는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드디어 1951년 7월초 유엔군과 공산측은 〈휴전회담〉 개최에 합의함으로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사접촉선을 중심으로 전쟁은 지구전의 양상을 띠었다.

참고자료
김영호,《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성신여대 출판부, 2006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