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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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후퇴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1951년 1월 4일 한국 정부는 부산으로 후퇴했고 유엔군도 서울로부터 철수를 완료했다. 서울 주민 40%이상이 피난했던 이 사건을‘1·4 후퇴’라고 부른다. 중공군은 전쟁 개입 이후 10월과 11월에 걸친 두 번의 대공세를 통해 평양을 탈환하고 북38선 이북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러한 전투의 승리를 확대하기 위해 중공군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제3차 대공세를 개시했다. 이 대공세는 신정공세라고도 불리운다. 이 대공세를 통해 공산세력은 서울을 재점령하여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38선 이남까지 진출하여 병력이 증원된 후 춘계 대공세를 준비하여 유엔군을 한반도로부터 격퇴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서울이 재함락되자 미국에서는 전세가 공산측으로 완전히 기울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트루먼행정부는 가용한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여 38선까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다. 중공군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오면서 보급선이 길어졌다. 미국은 공군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중공군의 후방 보급선을 공격하여 중공군의 계속된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다.

내용
워커장군을 대신하여 미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장군은 축차방어선을 설정하여 중공군의 대공세에 대비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대규모 신정공세에 밀려 유엔군은 서울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철수와 함께 민간인들의 철수도 이루어졌다. 서울 철수에 대한 보고를 받은 이승만대통령은 전쟁 초기 철수와 달리 매우 추운 겨울에 철수가 이루어져 민간인의 희생과 고통이 매우 클 것으로 우려했다. 전쟁 초기 혼란스러웠던 철수 상황과 달리 1·4 후퇴 당시에는 정부의 통제에 의해 비교적 질서정연하고 신속하게 민간인 및 정부 관리들의 철수가 이루어졌다. 1·4 후퇴 이후 유엔군은 37도선에서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 정부는 1·4 후퇴에 직면하여 국민총력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민방위군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국민방위군은 만17세 이상 만 40세 미만의 남자로서 지원에 의해 입대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방위군에 입대한 병력은 50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1·4 후퇴 함께 서둘러 추운 겨울에 후방지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방위군 사령부 간부들의 부패로 인하여 수많은 방위군들이 굶어 죽거나 동사했다. 이 사건으로 국민방위군은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역사적의의
서울 지역 뿐만 아니라 흥남에서도 대규모 철수 작전이 이루어졌다. 미 제10군단은 병력·차량·전투물자를 흥남으로부터 철수시키기 위해 125척의 해군 수송선을 동원했다. 국군 제3사단,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이 무사히 철수했다. 흥남철수작전은 10만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차량, 35만톤의 전쟁 물자를 배를 이용해 철수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민간인 약 10만명을 같이 철수시켰다. 이 점에서 흥남철수작전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길이 빛날 역사적 작전이었다. 흥남철수작전과 1·4 후퇴 이후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철군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확전을 각오하고서라도 중공군을 격퇴시켜야 할지를 결정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은 중공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술핵무기 사용을 신중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맥아더장군 해임 이후 유엔군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 하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 근처에서 공산세력과 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로써 전쟁 시작 이후 양측은 4번에 걸쳐 번갈아 서울을 뺏고 빼앗기면서 결국 38선 근처에서 전선이 고착된 이후 휴전협상이 개시되어 정전할 때까지 전쟁은 지구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참고자료
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 (중)》, 1996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