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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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수복과 38선 돌파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서울은 한반도의 중심이다. 북한은 ‘선제타격계획’으로 명명된 남침 계획에서 3단계 작전계획을 세웠다. 제1단계는 38선상의 국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남침 3일만에 서울 점령에 성공했다. 전쟁 기간 중 서울의 상징적 의미는 매우 컸다. 서울은 네 번에 걸쳐 공산세력에 의한 점령과 유엔군과 국군의 수복을 전쟁 기간 중 되풀이했다. 맥아더 장군이 군산이나 주문지 지역 대신에 인천 지역에 상륙작전을 감행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도 서울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또한 서울은 산업·교통·통신의 중심지였다. 서울 수복은 북한 방어선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인민군을 양분하여 궤멸시켜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미국 10군단과 국군은인천상륙작전 성공 직후 서울 수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맥아더장군은 전쟁 발발 3개월째가 되는 9월 25일까지 서울을 수복할 것을 명령했다. 김포공항을 장악하는 임무가 서울 수복 작전의 가장 중요한 작전 목표 중 하나였다. 유엔군 비행기가 병력 및 전쟁 물자를 서울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항의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내용

미 제10군단이인천 상륙작전 직후 한강으로 급격하게 진격해 들어오자 인민군은 주변 지역에 있던 부대들을 규합하여 저항했지만 유엔군과 국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9월 18일 미 제1해병사단은 김포공항을 완전 장악했다. 미 제7사단이 인천항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9월 19일에는 한강 이남 지역을 유엔군과 국군이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한강 도하 작전시에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17연대에 의해 주도된 연합 작전에 의해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9월 28일 낮부터 서울 지역은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서울 지역 행정 기구가 기능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경찰도 치안 유지에 나섰다. 서울 지역 주민들은 유엔군에 의해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있었다. 9월 29일에는 역사적인 환도식이 중앙청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역사적의의

환도식이 끝난 이후 이승만대통령은 맥아더장군에게 지체없이 38선을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유엔으로부터 38선 돌파와 관련된 권한을 아직 부여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미 미국은 인천상륙작전 개시 일주일 전인 9월 9일 국가안보회의를 통해 38선 돌파를 결정해둔 상태였다. 그렇지만 한반도 통일과 관련된 유엔 총회 결의안 통과를 기다려 38선 돌파를 감행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10월 7일 유엔 총회는 유엔군의 북진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대통령은 하루라도 빨리 38선을 돌파하여 적을 격파하고 통일을 달성하고 싶었다. 이승만대통령은 군군 최고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국군 단독으로 북진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은 국군 3사단이 10월 1일 38선을 최초로 돌파했다. 전쟁 초기 한국은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국군의 38선 돌파는 정일권 육해공 총사령관이 미8군 사령관과 상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미국은 유엔 총회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10월 9일부터 북진하기 시작했다.


참고자료

김영호,《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대 출판부, 2006
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 (상)》 국방국사연구소, 1995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