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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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쌍벌죄 규정

주제유형
정책/제도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근거

「형법」(1953.9.18 법률 제293호)


배경

일제 식민지 시기 1922년(대정11년) 12월 7일 「조선민사령」의 제11조가 제2차 개정되어 1923년 7월 1일부터 실시되었다. 이로인해 일본 민법의 의용범위가 더 확대되었다. 이 때 재판상 이혼이 허용되고, 분가 절가재흥(絶家再興), 혼인, 협의상이혼, 입양 및 협의상 파양(罷養)에 있어서 종래의 사실주의를 지양하고 신고를 요건으로 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에도 이때부터 법률상으로 유교적 가부장적 관습이 아닌 법에 따라 혼인과 이혼을 할 수 있고, 자유의사를 존중받을 수 있게 되었다. 종래 조선에서는 혼인은 주혼자 사이에서 결정되어 혼인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이혼도 칠출(七出), 의절을 이유로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었다.그럼에도 여성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다. 축첩제도가 법률상 폐지되었지만, 일제말까지도 단순히 축첩한 사실만으로는 이혼이 원인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과 비교할 때 식민지 조선여성에 대한 차별이었다. 즉, 일본에서는 축첩은 본처에 대한 중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이혼사유에 포함되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배우자의 간통에서 처의 간통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였고, 이혼의 원인이 되었지만 남편이 간통을 한 경우, 유부녀와의 관계만 아니면 간통죄가 성립되지 않았다. 그 처는 이를 이유로 이혼을 청구하거나 남편을 간통죄로 고소할 권리가 없었다. 이것은 처에게만 일방적으로 일부일처제를 강요한 것으로서 사실상 첩의 존재를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일본은 2차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에 남녀평등주의에 입각하여 형법상 간통죄를 폐지하였다.


경과

축첩문제는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여성계의 주요 문제 중 하나였다. 미군정이 설치한 부녀국에서도 축첩문제에 대한 조사도 실시하는 등 현안으로 다루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은 1953년 9월 신형법이 제정 공포됨으로써 일단 법적인 측면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하게 되었다.


1950년 5월에 출범한 2대국회에는 개원한지 1개월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51년 1월에 부산 피난국회가 열렸는데, 당시 국회의원으로 보사분과위원회에 속해 있던 박순천과 초대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임영신 2명의 여성의원이 있었다. 이들과 여성계의 적극적 활동으로 「형법」에 쌍벌죄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이런 논의가 진행되던 부산에서 여성단체들은 트럭에 현수막을 달고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이 법의 중요성을 알렸다.이 법안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의가 전개되었다. 첫째, 여성편에 서서 쌍벌죄의 조항을 삭제하거나 남자만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원들이 있었다. 즉, 현실에 비추어 남편을 같은 조건으로 처벌하면 이혼이 증가하고 이로 인한 가정파탄이 빈번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둘째는 아내있는 남편이 간통했을 때만 남편을 2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수정안도 있었다. 이유는 간통하는 여자보다 남자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제안에 대해 여성의원과 여성계는 남녀평등의 헌법정신을 살리면서 축첩의 관행을 시정하는데는 쌍벌주의안이 더 타당하다고 보았다. 여성의원들은 반대하는 남성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이중 생활은 일체 불문에 붙이도록 하자”고 강조하여 남성의원들을 안심시키면서 찬성하는 의원을 확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결국 간통죄 폐지론과 남녀쌍벌론이 대립되다가 3표의 근소한 차이로 쌍벌주의가 채택되었다.


내용

1953년 9월 18일 제정된 「형법」(법률 제293호)은 일제시대부터 적용되어 온 「형법대전」과 「조선민사령」에 규정된 간통죄 처벌 규정을새로 제정하면서 개정한 것이다. 종전의 법은 간통죄에 있어 남녀불평등하게 형벌을 부과하였다. 이것을 남녀평등 원칙에 의해 간통한 남녀 모두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제22장 풍속을 해하는 죄’의 “제241조(간통) ①배우자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 ②전항의 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논한다. 단 배우자가 간통을 종용 또는 유서한 때에는 고소할 수 없다.“로 규정되어 있다. 


이와같이 축첩을 간통죄로 고발하여 법적으로 형을 줄 수 있게 됨에 따라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어 있던 축첩의 인습을 제거하게 되었다는 측면에서 사회개혁적 의미가 있었다.


참고자료

김엘림, 윤덕경, 박현미 《20세기 여성인권법제사》 한국여성개발원, 2000
한국부인회총본부 《한국여성운동약사: 1945년~1963년까지 인물중심》 1986


집필자
정현주(서울특별시북부여성발전센터 소장)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