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URL 복사

서해훼리호 침몰사건

주제유형
사건/사고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원인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10시 10분경 위도 앞바다(전북 부안군 위도 앞 해상)에서 발생하였다.


사고원인은 출항 당시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14m 로 불어 파고 2~3m 로 여객선이 출항을 해서는 안 되는 악천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출항하였고, 출항 후 좌현 정횡(배 왼쪽중앙)부분으로 닥치는 파도가 예상보다 높아지자 선장이 뱃머리로 파도를 받기 위해 침로를 60도 회전하여 시속 12노트로 진행하다가 임수도 북서쪽 1.9마일 지점에서 원항로로 복귀하기 위해 남쪽으로 40도 가량 변침하는 등 기기를 무리하게 조작하는 등 운항미숙 및 무리한 기기조작이 원인이었다.


어른 키보다 높은 파도, 정원(221명)보다 141명을 더 태운 배의 앞부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높은 파도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뚱거리던 여객선은 갑작스러운 키 조작에 뒤집어지고 말았다. 292명이 수장된 대참사는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최소한의 안전수칙마저 지키지 않았던 욕심의 결과였다.


내용

사고로 인한 피해는 인명피해 사망 292명(승선인원 362명, 70명 구조), 재산피해는 선박 1척 소실이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는 당시 신문을 비롯한 각 언론 매체에서는 ‘후진국에서나 있을 수 있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 로 보도되어 온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사건이다. 사망 273명 이라는 기록적인 인명피해를 남긴 서해훼리호 참사는 사고 얼마 전 목포비행장 야산에서 민간항공기 추락에 의한 60여 명이 사망한 사고와 맞물려 그 충격은 배가 되었다.


충격이 컸던 만큼 사고원인에 대한 관심도 집중됐지만 원인이 밝혀 질수록 국민들의 실망은 더욱 깊어졌다.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탑승 정원이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당국의 관리감독도 형식적으로 이뤄져 있었다. 또 기상체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선장은 선장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했고, 항해사는 휴가 중이라 그 업무를 갑판장이 대신했다. 승객들이 한쪽으로 몰려 타지 않도록 유도하고, 비상시 구명장비를 사용법 등을 알려야 할 안전요원은 단 2명 이었다.


사고 직후의 위급상황을 알려준 사람도 없었고, 구조요청도 하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구명장비가 어디 있는지 몰라 아이스박스 등에 매달려 목숨을 부지했다. 해난 구조체계에도 구멍이 뚫려 있었다. 경찰헬기는 신고 접수 후 30분 뒤에 출동했고, 군산해양경찰서 소속경비함정은 사고현장에 1시간 뒤에 도착 ,시체 인양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사고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사고 당일 기상은 폭풍주의보는 발행되지 않았으나 파도가 높고 초속 10-13미터의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주의를 요했으나 출발예정 시간인 9시를 지나 9시 40분에 무리한 출항을 하는 등의 안전의식 결여, 정원(221명)의 2배에 가까운 362명을 무리하게 승선시키는 등 초과승선이 상습화하는 데에 따른 당국의 지도·감독 소홀, 비상사태 발생시 인명구조에 사용되는 구명장비의 미작동(선체에 설치된 구명정 4대 중 1대만 작동), 소방측면에 있어서 실제 구조작업 및 선박인양 작업에 동원될 수 있는 인력, 장비의 부족 등이 지적되었다.


사고의 대책으로는 승선인원의 철저한 확인 및 승선인원 통제(구명정 등 사고발생 시 즉시 가동될 수 있도록 평상시 유지·관리 및 감독) 등 철저한 안전대책이 요구되며, 소방측면에 있어서 구조수색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장비확보와 수중작업이 가능한 전문인력의 양성 등의 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참고자료

이수경《대형재난사고와 국가위기관리》국립중앙도서관, 2005
중앙119구조대《재난유형별 사고사례집》중앙119구조대, 1998
〈우리는 아직 후진국이다(동아시론)〉《동아일보》1993.10.16


집필자
김태환(용인대 경호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