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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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원 및 광부 독일파견

주제유형
역사적사건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발생배경

광부 파견은 한·독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당시 서독은 전후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근무여건이 열악한 3D 업종의 하나인 광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서독은 모자라는 3D 업종의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가난한 한국에 손을 벌렸고,  달러와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원조와 차관에만 의존한 1960년대 초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공장을 지으려 해도 돈과 기술이 없어서 지을 수가 없었으며, 실업률은 치솟아 40%에 육박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과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내용

한국 정부는 1966년에 서독과 특별고용계약을 맺고 간호사로 3천명, 탄광광부로 3천명을 파견하였다. 1977년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야기된 것을 경험한 독일은 독일정착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한국 동포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기한부 노동인력수입계약’을 한 것이다. 달리 말해서 독일은 '반정착적 정책'을 애초부터 실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몇몇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3천명의 광부는 계약 원칙대로 3년마다 교체되었다. 즉 3년간의 노동을 마친 동포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그만한 수의 광부가 새로이 한국에서 오곤 하였다. 그런데 그 당시 한국의 실업상태가 아주 심할 때라 3년 노동을 끝마친 동포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보다는 제3국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밖에 소수의 동포들이 3년이상 더 계속 체류하였는데 그들은 독일여성과 결혼한 사람들, 광산에서 통역이나 사무원으로 일하는 사람들그리고 3년 노동을 끝내고 그간에 저축한 자기 재정으로 유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간호사들의 형편은 아주 다르게 전개되었다. 이들도 광부노동계약과 같이 3년 기한의 계약으로 되어 있었으나 고용자 측인 독일병원들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해 반대한 것이다. 즉 한국간호사들은3년간의 생활을 통해 언어와 병원생활에 익숙하게 됨으로써 병원측에서 기대한 목적의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한국 간호사들과계약을 연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독일체류는 사실상 무기한으로 허용된 셈이 되었다. 이로써 독일의 외국인 노동력 수입정책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즉 외국인 노동자의 장기간취업과 동시에 장기간 독일체류라는 원치 않는 현실에 직면하며 스스로의 외국인정책에 일종의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한국간호사 또는 간호보조원들은 고용자, 병원 또는 양로원이 원한다면 무기한으로 독일에 체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한국 간호사나 간호보조원과 결혼한 광부들은 그들의 부인이 체류하는 동안은 역시 독일에 계속 체류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독일에 장기체류가 가능하게 됨에 따라 독일국적을 얻는 동포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이 나라에 정착하여 실상에 있어 '이민'의 현실을 이루게 되었다.


역사적의의

파독 광원과 간호사의 수입은 1970년대 한국 경제성장의 ‘종자돈’역할을 했다. 광원과 간호사들의 파독 계약조건은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한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원은 모두 7932명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탄광에서 일을 하고 연금과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의 70~90%를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이들이 한국으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한국 GNP의 2%에 이르렀다. 또한 서독 정부는 이들이 제공할 3년 치 노동력과 그에 따라 확보하게 될 노임을 담보로 1억5000만 마르크의 상업차관을 한국 정부에 제공했다.


참고자료

최종고《한독교섭사》1983, p. 300


집필자
유성재(중앙대학교 법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