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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대일 외교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36년간의 식민통치는 한일 국교정상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미국의 요청으로 국교수립을 위한 한일예비회담을 시작했다. 1952년 2월 본회담이 개최되었지만, 국교정상화 교섭은 1960년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 1965년 6월 「한일 간의 기본관계에 대한 조약」을 포함해 6개의 조약과 협정이 서명되고, 동년 12월 비준서가 교환됨으로써 한일 국교정상화가 마무리되었다.
경과
대일외교 목표는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협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수교 당시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자금(약 6억 달러)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일 간에는 독도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참배로 대변되는 과거사 인식 문제라는 현안이 존재한다. 물론 1983년 1월 나카소네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에서 일본이 한국에게 40억$ 경협차관을 제공한다고 발표하고, 다음해인 1984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개선되는 기미를 보였으나, 1990년 종군 위안부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면서 한일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가 ‘전후 50주년 특별담화’를 통해 과거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히면서 한일관계는 다시 우호적 분위기로 전환되었고,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찌 총리는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역대 한・일 정권들은 한결같이 ‘미래지향적 한미관계 구축’을 외쳤지만, 한・일 양국 사이의 핵심 현안은 번갈아 가면서 수면위로 부상하여 한일관계 증진의 걸림돌로 작용하였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협정」과 2016년 11월 23일 「한일 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한일 갈등이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협정」 재협상과 「정보보호협정」 재검토를 주장하고, 독도문제 및 역사왜곡에 대해 단호한 대응을 강조하고 있다.
내용
대일외교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안보적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중국의 부상으로 일본이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일본이 경제대국임에는 변함이 없다. 북한의 도발이라는 현실적 위협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잠재적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일 안보협력이 더욱 강조된다.
참고자료
이면우 편, 《위안부합의와 한일관계》, 세종연구소, 2017. 
더불어민주당, 〈나라를 나라답게〉, 《제19대 대통령선거 정책공약집》, 2017. 
외교부, 《한국외교 60년》, 2009.
집필자
이대우(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초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