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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보급 및 급식제도 변천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1946년 1월 15일 국방사령부에 조달보급과가 설치돼 조선경비대의 보수체계를 마련했다. 당시 부대급식은 연대별로 현지조달했고, 일본군 메뉴에 준해 미군이 제공하는 부식비로 조변 급식했다.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지만, 중앙통제기구가 없어 부대마다 제 각각이었다. 대개 1일 주식량이 6홉이었는데, 각 부대의 균형된 급식은 육군본부에 병식과가 설치된 49년 이후에 가능해졌다.


정부 수립 이후 장교의 생활수준은 겨우 식생활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들 중에는 해외 귀국자나 월남자들이 많아 무주택으로 영내에 거주한 자도 많았다. 사병의 급식도 자체 국방비에서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질적으로 저하됐다. 부식 외에 하루에 화랑 담배 10개비와 건빵·캐러멜 등이 주기적으로 보급됐고, 세면용 비누·수건 등이 지급됐다. 피복은 초기에 일본군 피복창고의 적재품을 쓰다가 미군복으로 보충했으나, 전투복이나 양말은 원조의 부족으로 국산화해 보충했다. 


1950년 육군피복창에서는 내복을 비롯해 1일 작업복(67년 전투복으로 개칭) 1,200착을 생산해 자체 충족시켰다. 훈련화나 식기·비누·조미료는 민간공장에서 군납을 받았고, 군량미는 정부양곡을 확보해 각 지구 보급창에서 보급했다. 이로써 미 지원품목인 유류와 의무·공병·통신·병기 등 일부를 제외한 나머지는 국방예산으로 충당해야 했다.

내용
가.6·25전쟁 전후의 보급 및 급식
전쟁 기간중에는 미 군사원조의 제공이 잉여물자나 미군운영의 군사비 일부로 미군시설에서 한국군 사용부대로 직접 지원되었기 때문에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조달, 소요, 획득에 관한 군수관리가 불필요하여 오직 분배관리 위주의 군수운용에 관심이 있었다. 장비 및 비품의 보급은 T/E 보충보급제도를 적용했고, 소모품은 청구보급제도가 적용되었지만 소모기준이나 보급기준은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급양은 전쟁전에 백미와 정맥이 제공되었던 것과 달리 취사의 용이성을 고려하여 백미와 압맥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부식은 현지구매제도가 1952년까지 적용되었고, 1953년도부터 지구급양대를 통한 조달지원이 이루어졌다. 1956년 4월 23일부터 5월 2일까지 육군본부 계획으로 최초의 전군 급양감사를 실시했고, 58년에는 한·미 합동급양감시반을 설치하여 월 2회 전군 부대 순회감사를 실시했다. 


1967년도에 정부의 중농정책에 호응하여 사단 단위의 영농교육대를 설치하여 자활영농을 강화하는 한편, 대간첩작전 병력 급식용인 휴대용 하드빵(250g)과 오징어포(13g)을 보급했다. 그리고 69년 1월부터 최초로 라면을 주 1회(240g)을 급식하도록 제공했다.


나. 1970년대 보급관리 및 급식제도
1964년 육군에 최초로 씨링보급(할당보급)제도를 적용했는데, 당시 피복류 중 전투복이 씨링품목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사용부대에 대하여 보급기준에 의거 육군본부가 보급통제의 수단으로 채택한 일종의 통제보급제도였다. 69년도에는 유류와 의무약품에 대해 적용했고, 그 이후에도 적용가능 품목을 검토하여 확대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1970년도에는 12개 보급품목으로 확대했으며, 72년에는 32개 품목으로 물량과 자금씨링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28일 완성장비 및 탄약 등 전 품목에 대해 씨링보급제도를 적용했다. 


급식제도는 71년 전투식량은 주·부식 겸용과 주식용으로 구분하여 각형 건빵과 육포로 조변했으며, 72년도에는 콩나물용 콩의 조변을 농협에서 일반업자로 전환하고 식탁용 식염을 식품 위생면을 고려하여 제제염 단일 품목으로 조정했다. 그리고 73년도에는 격오지 부대의 급식 질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통조림을 조변 보급했으며, 74년도에는 장유류와 두부를 제조했을 뿐만 아니라 화랑담배에 휠터를 부착하여 품질의 향상을 기했다. 


다. 1980년대 이후의 보급 및 급식제도
1981년부터 보급제도는 그 이전의 물량·자금의 씨링보급에서 자금관리 방식으로 전환되었으며, 83년 이후에는 비교평가와 분석평가를 적용한 청구보급의 형태로 바뀌었다. 특히, 1981년 1월 1일부터 자금관리 보급제도로 전화하면서 전군자산의 정확한 파악을 위해 적절한 군수지원소요 산출재원을 획득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그해 2월 전군 재물조사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했다. 전군 재물조사는 1981년부터 82년까지 2회, 그리고 83년부터 84년까지 2회에 걸쳐 총 53만 4,254항목에 대해 실시되었다. 장부와 실제 보유자산을 파악하여 상태별 분류와 교체소요를 판단하여 84년 조달계획에 반영했는데, 이로써 경제적인 군운용과 한국적인 군수체제의 정립을 위한 제반 노력이 가속화되었다. 


급식제도는 1976년부터 시행한 1식 3찬제도에다 소위 ‘개발전투식량’의 확보에 힘입어 80년대에 들어와서 적극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 82년부터 매년 주곡의 혼식비율을 조정하여 백미 소비비율을 증가시켰고, 식생활 개선을 통해 주곡을 절약하기 위해 조식은 빵식단으로 전환하고 차등 급식제도 도입을 위한 연구활동을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식급식에서 가공식품의 조변방법과 품목을 개선하고, 부대조변 급식인 김장김치를 업체 가공김장으로 대체하는 등 식생활의 개선이 있었다.
참고자료

국방부,«군수변천사», 1996.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한국전쟁사»제1권, 1967.

집필자
백기인(원광대 군사학부 외래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22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