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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소년지원병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소년지원병은 만17세 이하의 자원입대한 소년들이며 ‘병역임시조치령’(1949.1.20), ‘국군 전사자 명부’, 그리고 2001년 국회의 ‘국가유공자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중 개정법률안’ 등에 의해 확인된다. 이들 중 확인 가능한 소년지원병 전사자 수는 약 2천여 명을 상회하며, 여기에는 정식 군번을 부여받기 전에 전사한 소년지원병들이 제외되어 있다.
배경
소년지원병은 6.25전쟁 당시 만 17세 이하로 징집대상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지원 입대한 자들을 지칭하는데, 6.25전쟁 당시 징집대상 연령에 있던 학도의용군과는 구별된다. 소년지원병의 존재는 1996년에 설립된 ‘6.25참전소년지원병전우회’의 활동이 있기 전까지 사회적 관심의 영역밖에 있었다. 공식 전사내용에서도 소년지원병의 참전과 전투, 전사상자에 관한 기록을 따로 언급하지 않고 학도의용군의 일부로 기록되어 왔다.
내용

6.25전쟁 초기 소년지원병이 대거 참전한 시기의 병력의무 연령에 관한 규정은 병역법에 준해서 적용될 수 있다. 정부수립 후 최초의 병력관계법인 ‘병역임시조치령(1949.1.20)에서는 “병력충원 방식에서 모병원칙을 취하고, 모병은 매년 만 17세 이상 만 28세까지의 자로서 군사교육이나 청년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자 중에서 모집한다”하고 규정하였다. 이를 토대로 공포된 것이 ‘병역법’이었다. 이를 근거로 할 때 전쟁기간 중 병력의무 대상연령은 만17세 이상이었고, 만17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제2국민병 소집이 실시되었다. 따라서 소년지원병에 포함되는 연령상항선은 ‘1933년(만17세) 9월 1일 이후 출생자 중 자원입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전쟁기간 중 소년지원병의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어 있지 않지만, 참전자들에 의하면 대량 3천∼3천5백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군 교육대를 거쳐 일정기간 동안 훈련을 받은 후 현역으로 복무하는 경우와 야전부대에 직접 배치되는 경우로 나뉘었는데, 후자의 경우 야전부대에 배치되어 곧바로 포항, 안강, 영천, 다부동,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군번을 부여받기 전에 전사한 경우가 많아 정확한 수치를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 또 학도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1951년 3월 정부의 복교령 조치에 따라 학교로 돌아간 경우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기록도 현재 확인할 수 없다.

 
소년지원병으로 참전하여 군번과 계급을 부여받은 후 전사한 인원을 추출하면 1933년 9월 1월 이후 출생자가 총 2,464명이다. 소년지원병 전사자명부에는 출생년도 이외에도 출신지, 군번, 소속, 계급, 전사일자, 전사장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출신지 분포는 서울, 경기지역이 29%, 경북, 대구지역이 약 20%이고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피난민 중에 참전자들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지원형태는 대부분 개별 지원보다는 가족이나 친구 또는 단체와 학교별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입대한 소년지원병들은 짧게는 2-3일, 길게는 3주정도의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부대에 배치되었다. 지원병들에 대한 훈련은 대부분 각 사단에서 담당하였지만, 1950년 8월 14일 대구의 제1신병훈련소가 설립된 후에는 이곳에서 배출되는 지원병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야전부대에서의 훈련과는 달리 신병훈련소에서의 훈련기간은 최소 10일에서 최대 21일이었다. 이러한 신병훈련소는 1950년 9월 8일 제1훈련소 이외에 경상도와 제주도에 4개의 훈련소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소년지원병들은 대부분 학생출신이었으므로 전투에는 서툴렀으나 복종심과 충성심이 강한 편이었다. 게다가 비교적 영리하고 순발력이 뛰어나 주로 수색대와 계산이 필요한 포병에 주로 배치되었다. 전선에 배치된 소년병들은 말이 지원병이지 거의가 병사라고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격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그나마 광목에 국방색 물감을 들인 군복을 지급받고 1-2주간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으나, 나중에 8월 격전이 벌어지고 난 후부터는 훈련도 받지 못한 채 교모를 쓴 교복차림으로 전선에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소년지원병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전투로는 다부동 지구 674고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11연대 3대대 소속 소년병들은 1950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수많은 인민 피해를 무릅쓰고 기어이 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안강-기계방면의 3사단에 소속된 소년지원병들은 학도의용군의 일원으로 독자적인 부대를 운영하면서 전투에 참가했다. 3사단의 용전분투 소식은 감포, 경주, 포항 등지의 학도들을 고무시켜 학도병에 자원하는 숫자가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국군의 38선 돌파가 있자 학도병들도 함께 38도선을 돌파했다. 양양에 도착한 학도의용군은 주로 수복지구에서 선무임무를 수행하였다. 학도병들은 이 지역 학생들을 모아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양양지부와 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학도병들은 낮에는 사단사령부의 각 부처의 행정병으로 파견되어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밤이면 학도의용군의 부대원으로 복귀하여 사단경비 임무에 임하기도 했다.


이밖에 소년지원병들은 주로 수색대에 많이 투입되어 적정수색이나 연락병, 그리고 북한군 낙오병 색출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당시 포병대는 각 병과 중에서도 두뇌가 우수한 병원을 골라서 편성하는 것이 상례였기 때문에 소년병들이 어느 병과보다도 포병에 대거 입대하게 되었다. 소년지원병 전사자 명단 중에 경찰에 지원한 사람이 많았던 것도 눈에 띤다. 이는 6.25전쟁 당시 군 보급로 경기와 군 작전 지원 및 게릴라 토벌작전에 경찰이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전쟁기간 동안 소년지원병들은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많은 공로를 세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의 참전이 다른 부대원들에게 큰 용기와 자극을 주었다고 하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소년지원병들은 대부분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희생이 매우 큰 편이었다. 연도별 소년지원병들의 희생자 상황을 정리하면, 1950년 635명, 1951년 1131명, 1952년 357명, 1953년 341명이었고, 특히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 사이 전사한 수가 1천여 명을 상회하였다.

참고자료

박동찬 <소년지원병의 참전과 활동><<국가수호정신 학술논문집1>> 국가보훈처, 2005.
육군본부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 육군본부, 1994.
병무청 <<병무행정사>>(상) 병무청, 1985.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신오성,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03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