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국방/병무

대한청년단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대한청년단은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거 1948년 12월 19일 해방 이후 존속되어 온 6개 우익 청년단체들 중 조선민족청년단을 제외한 5개 우익청년단체들과 20여개 군소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결성한 청년단체이다. 이날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대한청년단 결성대회에서는 총재에 이승만 대통령을 추대하고 단장에 신성모를 임명하였다. 대한청년단은 1953년 7월 23일 대통령령 제813호로 민병대령이 공포되고, 모든 청년단체를 해산하고 민병대에 편입하라는 대통령의 담화에 따라 9월 17일 자체 해산 성명을 발표하였다.
배경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청년단을 결성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제14연대 반란사건으로 야기된 여순10.19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물리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해 당시 정부, 국회, 우익단체들이 모두 찬성하였기 때문에 통합문제는 별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다. 이는 청년단체들을 기반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여 공산세력들의 책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청년단에 관계한 인사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장택상, 안호상, 유진산, 전진한 등 당시 정관계 지도급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내용

대한청년단은 여순10.19사건 이후 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가운데 남한 내 확실한 반공세력인 청년단체들을 통합하여 군경 보조역할을 맡기기 위해 설치된 준군사단체이다. 대한청년단은 호국군에 뒤이어 설치된 청년방위대의 산파역을 했고 또 전쟁 중에는 중공군의 개입에 따라 전선이 불리하게 된 상태에서 국민방위군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한청년단에 흡수된 청년단체로는 한국광복청년회, 대동청년단, 조선건국청년회, 대한민주청년연맹, 한국정년회, 서북청년회, 독립촉성전국청년회, 청년조선총동맹 등이었다. 그러나 청년단체들의 통합은 완료되었지만, 각 지방단부 통합과 그에 따라 주도권 경쟁은 계속되었다.


대한청년단은 총재와 단장을 제외한 부단장, 최고지도위원, 사무국장, 기획구장, 선전국장, 훈련국장, 감찰국장, 조직국장, 교도국장, 건설국장, 중앙훈련소장, 서북변사처장, 서북청년단장 등 간부급이 총 21명이었다. 이중 대동청년단 출신 3명, 서북청년회 출신 4명, 조선민족청년단 출신 3명, 청년조선총동맹 출신 5명, 대한독립청년단 출신 2명, 그리고 국민회청년단 출신 1명이 포진되었다.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확보한 대한청년단은 강령과 임원진을 발표하고 단원을 조직적으로 훈련시키는 등 조직 강화에 심혈을 기울렸다. 대한청년단의 기본목표는 공산주의자를 처단하고 조국통일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와 취지에 따라 대한청년단은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가면서 육군사관학교 제8기에 단원 200여명을 입교시키고 또 정부와 협의하여 1949년 11월에는 군사조직체인 청년방위대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간부양성을 위해 1949년 12월 1일 충남 온양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를 설치하는 한편, 대한청년단 배속장교와 호국군 출신장교를 이 훈련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한 후 고급간부로 임용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청년방위대 창설을 위해 1950년 1월초 제2회 대한청년단 전국대회 및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청년방위대 편성문제를 논의하였고, 1950년 3월초에는 청년방위대 조직을 위한 세부사항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세부사항은 30세 미만의 청년을 동원하여 민병을 조직한 후 호국군과 민보단의 우수한 청년을 장교로 임명하고, 나머지 청년들을 대한청년단에 합류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준비와 간부훈련을 통해 청년방위대는 1950년 3월 15일에 1차 조직편성을 완료하였고 그해 5월 5일에는 육군본부 직할로 사단급에 해당하는 20개의 청년방위단을 창설하여 조직편성을 완료하였다. 청년방위대의 편성은 대한 청년단을 주축으로 하되 그 간부요원은 대한청년단 배속장교와 해체된 호국군 장교를 우선적으로 선발하여 소정의 보수교육을 받은 후 임명하였다. 


대한청년단은 조선민족청년단의 단원 훈련 경험을 적극 도입 활용하여 전국의 간부와 일반 단원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하였다. 먼저 지방단부 간부급과 훈련책임자들을 중앙훈련소에서 훈련시킨 다음 단원들을 훈련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훈련수료자들은 청년단 배속장교가 되어 지방단부에 배치하였고 지방단부의 훈련은 지역사정에 따라 시기와 장소, 방법 등이 차이가 있었다.


각 지방단부는 보통 5일에서 20일간 초등학교에서 합숙훈련을 실시하였다. 훈련내용은 대체로 정신무장에 관계되는 공민교육, 기초훈련부터 전투훈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단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한 이유는 당시 산악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던 공비토벌에 군경보조요원으로 동원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대한청년단은 경찰과 합동작전에서 1,014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렇게 대한청년단이 토벌활동에 동원된 것은 여순10.19사건과 대구주둔 제6연대 반란사건 등으로 국군을 신뢰하지 않으려던 우익 진영의 당시 분위기와 치안유지와 공비토벌에 경찰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미군정기대부터 가장 확실한 반공세력이었던 청년단체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청년방위대의 주요 간부진은 대한청년단 임원인 김윤근(단장), 문봉제(부단장), 박경구, 유지원, 윤익헌, 강낙원 등이 맡았고, 각 방위단장은 대부분 대한청년단 지방단부의 단장급으로 구성되었다. 


대한청년단은 중공군 개입에 따라 장정들을 보호 및 소개하기 위해 설치되는 국민방위군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부는 이미 1950년 10월 20일경부터 제2국민병 등록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제2국민병력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정부에 신고하도록 하여 강제로 국민방위군에 편입하였다. 정부는 국민방위군 운영 일체를 대한청년단에 일임하였다. 대한청년단은 국민방위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간부들을 육군고등군사반에 입교시켜 특별훈련을 실시하였고 방위사관학교에서도 간부후보생을 모집하여 소정의 교육을 필한 후 방위장교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국민방위군 중위 이상의 간부들은 모두가 대한청년단 출신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참고자료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신오성, 1995.
남정옥 <국민방위군><한국전쟁의 새로운 연구1>>, 군사편찬연구소, 2001.
선우기성 <<한국청년운동사>> 금문사, 1973.
홍사중 외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 1982.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03
최초 주제 수정
2008. 0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