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나라자동차는 닛산의 블루버드 부품을 KD 방식으로 도입하여 조립생산한 것이었다. 현재 부평대우자동차공장 부지에 연 6천대 규모의 공장을 8월에 준공하고 11월부터 조립생산을 시작하였다. 이 차는 4기통 1,200cc로 최대속도 80km, 55마력의 엔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새나라자동차공업」은 면세특혜로 일본 닛산자동차 제품인 블루버드 1200cc차를 400여대나 완제품으로 들여왔다. 물론 이는 국내 자동차업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에 당초 400대의 새나라차 중 150대는 외국인 관광용, 250대는 일반 관광용으로 허가해서 들여왔으나, 1962년 5월 아시아 영화제를 빌미로 이 택시들이 일반택시로 둔갑해 버렸다. 당시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회사는 국산 시발택시였고 시발택시의 인기는 매우 높았다. 그러던 시발택시가 보다 현대모델인 새나라자동차 택시의 출현으로 하루 아침에 시세가 폭락하게 되었다. 당연히 새나라자동차의 블루버드 도입과정, 그리고 일반택시로의 전환과정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새나라자동차는 워커힐 신축, 증권파동, 빠찡꼬 부정도입 사건과 함께 국내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국회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전 국민의 관심을 끌었고 신문마다 톱으로 보도하면서 더욱 논쟁이 커졌다.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의 외환사정이 악화되면서 부품을 모두 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한나라자동차는 수입대금을 충당하기 어려웠고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견디지 못하고 생산을 중단했다. 1963년 5월 4대 의혹 중 하나였던 「새나라자동차」는 한일은행 관리로 넘어갔고 7월에는 사업이 중단되었다. 1963년 11월 「신진공업」이 「신성호」를 생산함으로써 자동차는 새나라자동차시대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정부는 5년 이내에 완전국산화 목표로 「자동차공업 일원화」 방침을 다시 발표했다. 「한국자동차조립기술협회」 26개 자동차관련업체들은 ‘세계 어느나라를 막론하고 단일 자동차 조립공장은 없다. 외국으로부터의 부분품 도입에 면세란 있을 수 없다. 기존 국내 시설로 자동차 공업을 육성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동차 일원화 방침 철회를 요구했다. 「신진공업사」는 국내유일의 국내최초 조립업체라는 점을 내세워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해 1966년부터 「신진자동차공업」으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도요타와 기술제휴로 5월부터 「코로나(CORONA)」를 조립생산해 1966년 3,117대를 생산했다.
김태현,《부산기업사》부산발전연구원 부산학연구센터, 2004.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 제1권, 중화학공업발전사》, 1979.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자동차공업을 지금 육성하여야 할 필요성》문서,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