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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중소기업

계획조선(1975)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1975년 「외항선계획조선제도」

1975년 「상공부 조선공업육성계획」(자국선 자국건조원칙에 의한 「계획조선」)

배경

정부는 한국이 타국과 비교해 알맞은 기후와 양질, 저임금의 노동력 등 조선공업에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조선공업이 경쟁력이 높다고 판단해 중점산업으로 육성했다. 그런데 「계획조선」의 실시는 선박의 수입대체효과 이외에 수출입화물의 수송에 있어서 국적선적취율(國籍船積取率)을 제고시킴으로써 국제수지개선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이외에도 「계획조선」은 선박건조에 있어서 원가절감을 기할 수 있는 표준형선의 개발과 생산성의 향상 그리고 국내설계능력의 배양과 선박용기자재의 국산화촉진 등 다각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어 정부는 「계획조선」을 적극 추진하기로 하였다.


「계획조선」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 것은 석유위기(오일쇼크)였다. 1970년대 전반까지 조선업계는 현찰을 받는 수출조선에 주력하고 선운회사는 외상으로 배를 들여오는 데 주력하여 국내선 주문건조가 안되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석유위기가 발생하고 조선업계와 해운업계가 모두 어려움을 겪자 상공부가 「계획조선」을 제시하였다. 세계적인 해운시황의 불황에 따른 국내조선업의 불황타개와 해운업과의 동시적 육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계획조선을 실시해 조선업계의 필요작업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어 이를 추진했던 것이다.

경과

1972년 이후 선박의 국내생산과 수출의 증가가 현저히 나타났다. 이에 따라 1972년 정부는 선박연불수출(船舶延拂輸出)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지급했다. 1972년 12월 상공부는 「중화학공업 업종별 육성계획시안」 중 조선공업육성방안을 만들었다.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화 선언에서 대통령은 “100만 톤급의 대규모 조선소를 앞으로 하나 내지 두 개를 더 만들어야겠다”고 밝혔다. 1973년 3월 상공부는 「장기조선공업진흥계획」을 발표하였고 3월 29일에는 제2 대단위 조선소 건설계획을 확정한 후 5월 29일 장기조선공업진흥계획에 대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이때 목표는 국내수요 선박의 자급과 1985년까지 선박수출 20억 달러 달성이었다.


그러나 1974년 석유위기로 조선불황이 나타났고 또 당시 조선산업은 관련산업이 낙후되어 있어 당분간 기술이나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1974년 6월 현대중공업은 1호 유조선 ‘아틀란틱 배런’을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세계에 내놓았다. 정부는 이에 힘입어 1975년 3월부터 「외항선계획조선제도」를 도입하고 본격적인 계획조선사업에 착수했다.

내용

1975년 3월 정부가 발표한 「외항선계획조선제도」 도입은 1977년까지 1차 계획조선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교통부가 합의한 것이었다. 조선량은 63억 원으로 조정책정되었으며 선주가 선가의 10-15%를 부담하면 85-90%를 국민투자기금과 전대(轉貸)차관에서 연리 12%, 3년거치 5년분할 상환조건으로 융자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해운공사」, 「범양전용선(汎洋專用船)」, 「아진(亞振)해운」, 「흥아(興亞)중해운」, 「동아(東亞)해운」의 5개 해운회사와 「현대조선소」, 「대한조선공사」, 「대선(大鮮)조선소」, 「대동(大東)조선」, 「부산조선소」의 5개 조선회사가 「계획조선」 관련회사로 지정되었다. 이때 지정된 건조선은 유조선이 없고 전부 양곡 등을 나를 벌크케리어선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운업체는 계획조선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교통부가 나서서 설득하고 정부가 여러 지원책을 우선보장하였으며 나아가 일정기준 이하 중고선 도입중지 명령 등을 사용함으로써 겨우 계획조선사업이 시작되었다. 1975년 9월 국회 상공위원회에 제출된 조선공업 육성계획에서 정부는 기본 목표로 자국선 자국건조 원칙에 의한 「계획조선」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계획조선은 원래 일본이 30여 차례 사용한 것인데 한국 역시 계획조선을 통해 국내수요 선박의 자급자족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참고자료

국회,《제94회 국회 상공위원회 회의록》제94회-상공제1차, 1975. 9.

국무총리기획조정실,《중화학공업의 오늘과 내일》, 1973.

상공부,《자국선 자국건조원칙에 의한 「계획조선」》, 1975.

상공부 중공업국,《주요업무추진현황》, 1975. 9. 26.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 제1권, 중화학공업발전사》, 1979.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Ⅲ): 정책결정과정의 이면사》, 1979.

한국무역연구소,《세계 중화학공업의 변천과 한국 중화학공업의 전망》, 1974.

집필자
박영구(부산외국어대학교 상경대학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