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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학도의용군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학도의용군은 「병역법시행령」(1959.2.18 대통령령 제1452호) 제107조의 규정에 의거하면, 1950년 6월 29일 이후 학도의용군(재일교포 학도의용군 포함)으로 유엔군 또는 유엔군에 예속되어 1951년 2월 28일에 해산할 때까지 근무한 자로서 전투에 참가하고 그 증명이 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학도의용군은 1951년 2월 28일에 해체되었으며 해체된 이후 학교에 복귀했거나 현역편입 또는 정훈공작대에 잔류하였다. 그리고 「병역법개정」(1957.8.15 법률 제444호)에 의하여 1958년 6월 이후 이들은 제1예비역에 편입되었다.

배경

학도의용군은6.25전쟁 시 학생의 신분으로 자진하여 참전하였던 의용병들이었다. 이들은 조국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학업을 중단하고 펜 대신 총을 들고 자유수호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던 것이다. 이들은 직접적인 전투 참가 외에도 경계근무지원, 탄약운반, 후방지역 선무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내용

남침 직후 많은 학생들이 선봉적으로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최초 1950년 6월 29일 수원에서 고급 중학생을 비롯하여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구국비상학도대를 조직하고 국군 및 유엔군에 종군하여 참전하였다. 이들은 현역복무를 지원한 것이 아니며 그 신분은 학생 그대로의 의용군이었다. 


1950년 7월중 학도 7백여 명이 부산에서 학도의용군을 조직 편성하여 전라도지방으로 출진하였다. 같은 무렵 포항전투에 참전한 제3사단 학도의용군은 대구지방에서 약 600여명이 지원하였다. 또한 8월 약 1천여 명의 학도들이 대전에 비상 학도군을 조직하여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편입되어 종군하였으며, 인천지구에서도 약 1천여 명의 남여학도가 전투에서 버리고 간 무기와 장비를 갖고 인천방위를 결의하였고 전세가 불리하자 수원 대전을 경유하여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편입되었다.


부산에서는 하갑청 장군이 약 8백여 명의 학도를 규합하여 특공대를 조직하여 참전하였고 밀양·성주·고령 등지에서도 약 1천여 명의 학도의용군이 국군과 유엔군 작전에 협력하여 패잔병을 소탕하였다.


강원도지구에서는 약 4백여 명의 학도의용군이 유격 제6대대를 조직하고 패잔병의 퇴로차단과 소탕작전에 참가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강원상교에 재학 중이던 김재천 학생은 강원상교·강원사법·강원농교 학생 5백여 명으로 의용군을 편성하고 치안유지에 임하다가 후에 제1군단에 편입되어 북진작전에 참전하였다.


이상의 학도의용군 이외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주동으로 조직된 학도의용군 정훈공작대와 멀리 일본에서 참전한 재일교포학도의용군이 있어 총인원수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약 27,700명의 학도들이 참전하였다. 그런데 정훈공작대는 읍면까지 조직체를 가지고 정훈공작을 전개하였으며 공비토벌이나 귀순공작에도 활약하였다. 그리고 중앙학도호국단에서 각 학교별로 조사 파악된 학도의용군 중 전몰학도수가 1,394명에 달한다고 집계하였다. 


학도의용군은 초기에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전투에서 전황을 아군에게 유리하게 이끄는데 기여하였으며, 다양한 후방지역에서의 지원활동을 통해 국민들과 국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참고자료

육군본부 <<후방전사>> 육군본부, 1953.
육군본부 <<학도의용군>> 육군본부, 1994.
채한국 외 <<한국전쟁>>(중) 국방군사연구소, 1996.
국방군사연구소 <<국방정책변천사(1945〜1994)>> 신오성, 199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