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국방/병무

전쟁피해통계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6.25전쟁의 민간인 피해통계는 대한민국 통계국에서 1953년과 1955년 등 몇 차례 집계한 「대한민국 통계년감」 자료를 근거하였으며, 각 군의 피해통계는 현재 각 군에서 집계한 「각 군 부감감실 통계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배경

6.25전쟁기간 한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하고 엄청난 전쟁피해를 입었다. 우선 인명피해에 있어, 아군측은 국군 육·해·공군 군인 피해가 608,033명, 경찰 19,034명, 학도의용군 7,000명 등 총 634,067명이었고, 유엔군 피해는 545,908명 이었다. 반면, 적군측은 북한군 801,000 명, 중공군 1,234,000 명 등 총 2,035,000 명의 손실이 생겼다. 그러므로 양측의 군인 피해만도 총 322만 명에 달하였다.


*한국군 및 유엔군 피해

구분

전사

부상

실종/포로

776,360

178,559

555,022

41,769

한국군

621,479

137,889

450,742

32,838

유엔군

154,881

40,670

104,280

9,931

내용

민간인 피해는 남한민간인 피해가 사망 244,663명, 피학살 128,936명, 부상 229,625명, 납치 84,532명, 행방불명 393,212 명 등 총 990,968명이었고 북한 민간인 피해가 150만 명에 이르러 남북한 총 손실이 249만 명에 달하였다. 피난민 수도 남한 피난민이 2,611,328명, 북한 피난민이 618,721명이었다. 


또한 1952년 3월 15일까지 발생된 전재민의 수가 천만 명을 넘어섰다.휴전 때까지 이 숫자는 훨씬 늘어났으므로 전체인구의 1/2이상이 전화를 입었다. 따라서 피해를 입지 않은 가족이 없었으며 전사자의 혈육, 전상자와 그 가정, 이산가족 등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 고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물적 피해도 인명피해 못지않게 컸다. 부산교두보를 제외한 전국토가 전장터였을 뿐만 아니라 37도선과 38도선 사이의 지역에서는 세 차례의 피탈과 탈환이 반복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한국이 38도선 이북 지역이었던 철원·화천·간성 일대와 서해 5도(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를 차지하였으나 옹진반도와 개성-사천 일대를 상실하였으며, 38도선에 의한 분계선 대신에 임진강하구-판문점-철원-거진 북방을 연결하는 선에 남북으로 폭 4Km의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이런 가운데서 개인의 가옥과 재산이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을 비롯해 군사작전에 이용될 수 있는 도로, 철도, 교량, 항만 및 산업시설이 대파되었음은 물론 군사시설로 전용된 학교 및 공공시설도 파괴되어 국민생황의 터전과 사회 경제체제의 기반이 황폐화되었다. 


그러한 피해와 파괴와 폐허에도 불구하고 반공의식과 생존을 위한 강인한 정신력은 강렬하였다. 이것이 전후복구와 재건의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이 정신력으로 전후 굶주림을 참고 땀 흘려 일한 인구의 한 세대를 지나면서 오늘의 우리를 건설하였다. 반면 공산북한정권은 그 체제가 갖는 자체 모순에다 국가자원을 군사력 증강에 과다 투입함으로써 오늘도 파괴를 딛고 일어서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참고자료

통계청 <<대한민국통계연감>> 통계청, 1955.
김원권 <<한국전쟁 피해 통계집>> 국방군사연구소, 1996.
채한국 외 <<한국전쟁>>(하) 신오성, 1997.
양영조 외 <<6.25전쟁사>>제3권 신오성, 2005.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