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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북한군의 남침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을 따라 배치되어있던 북한군의 야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어서 북한군 기동부대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또한 유격대와 육전대가 동해안을 따라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했다. 그때부터 정적에 휩싸여있던 38선과 동해안 일대가 단숨에 아비규환의 전쟁터로 변했다.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시작되자 38선으로부터 불과 40㎞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사전에 치밀한 남침계획을 수립했던 북한군도 남한의 그 같은 약점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 북쪽에 주공인 제1군단을 투입해 서울을 목표로 집중적 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부전선의 춘천과 동부전선의 강릉 북쪽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의 공격이 동시에 시작됐다.

내용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38선 일대의 국군 장병들은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으며, 주둔지에서 새벽잠을 깬 부대원들은 출동준비를 갖추기에 바빴다. 그동안 지속되었던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6월 24일(토요일)00시부로 해제되었으며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 ·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38선의 국군 방어진지에서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 부대와 치열한 접전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국군 부대들이 미처 준비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방어진지를 기습한 북한군의 공격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소련제T-3 4전차와 SU -76자주포였다. 그들의 전차와 자주포가 국군의 방어진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으나, 당시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했다. T-34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대전차무기도 없었다. 


전차의 위력을 보고 있는 국군 용사들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냥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화염병을 들고 또는 박격포탄을 메고 전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심하고 헤치를 열어놓은 채 진격하고 있던 전차에 올라타 전차의 내부에 화염병을 던졌다. 예상치 못했던 국군의 반격에 이제까지 무적임을 뽐내던 북한군의 전차는 화염에 휩싸이거나 궤도가 잘려졌다. 그러나 그 같은 특공대의 활약도 대세를 막지는 못했다.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전방사단으로부터 급박한 상황을 알리는 전화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자택에서 상황보고를 받은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은 곧 비상을 발령하고 신성모 국방부장관을 직접 찾아가 전쟁 발발 상황을 보고했다. 


북한군의 남침상황이 전파되면서 비상소집이 시작되었지만 장병들의 부대 복귀는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거리에는 방송 차량이 장병들의 부대 복귀를 독촉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극장과 운동장에도 비상사태를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싸울 병력이 부족한 전방진지는 장병들이 투입되기 전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1시 국방부는 전쟁 발발에 관한 공식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 사실이 신문 호외로 전국에 뿌려지자 국민들은 충격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 남침 전쟁의 기습 달성이 확실해진 것을 확인한 북한 정권은 오전 11시경 평양방송을 통해 “남조선이 북침했기 때문에 자위조치로서 반격을 가해 전쟁을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참고자료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 국방부, 1967.
양영조 외 <<한국전쟁>>(상) 국방군사연구소, 1995.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Ⅰ·Ⅱ 나남, 199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4전쟁사>>제2권 신오성, 2004.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