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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대한민국 정부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2차에 걸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유엔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국내세력 가운데 선거참여를 거부한 중간세력이 배제되고, 이미 1946년 6월 통일정부가 여의치 않으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였던 이승만과 이를 지지하였던 한국민주당은 미국의 지지를 받아 남한 정부를 수립하였다.


오랜 독립운동으로 대중적 명망을 지닌 이승만은 미.소와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현실적 국가건설노선을 추구하였다. 그는 공산주의가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국가의 건설에 장애가 된다는 반공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이미 북한에 공산당 중심의 정권이 기능을 하고 있었고, 남한에서 좌익세력이 벌인 수많은 투쟁으로 이들과 협의하여 정부를 세우는 일이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내용

1948년 3월 17일, 미 군정은 우익세력과 협조하여 선거준비를 진행하여 국회의원 선거법을 제정하여 발표하였다. 선거권이 만 21세에 달하는 남녀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었고, 피선거권은 만 25세에 이르는 모든 국민에게 인정되었다.


선거제도는 4대 원칙에 입각하였고, 선거구제는 1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였다. 총 의원수 300명 중 북한지역에 배당된 100명을 제외하고, 남한지역의 선거구는 부.군 및 서울특별시의 구를 단위로 인구 15만 명 미만은 1개구, 15만 이상 25만 명 미만은 2개구 등으로 200개 선거구를 획정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 총 13,272개 투표구 중에서 폭동이 일어난 제주도지역을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국민의 직접선거에서 총 200의석 가운데 제주도 2개구를 제외한 전국 198개 선거구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20일, 미 군정시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폐원되었으며, 같은 달 31일 제헌국회의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초대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는 신익희, 김동원이 각각 선출되었다. 7월 12일 국회에서는 헌법을 제정한 후, 20일 이승만과 이시영을 정.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48년 7월 24일 취임한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 내각으로 국무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장택상, 내무장관 윤치영, 문교부장관 안호상 등으로 구성하였다. 국방장관은 국무총리가 겸임하였다. 내각구성에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3년간의 군정기간을 거쳐 비록 통일 독립 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많은 갈등 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북한도 그들이 “남북조선 전체 인민의 진정한 총의를 대표하는 조선 최고인민회의에 의거하여 수립되었기 때문에 통일적 중앙정부의 수립이고, 조선인민이 가지는 유일한 합법적 조선 중앙정부”라고 맞섰다. 북한은 미 군정하의 남한과 비교하면서 “북조선이 걸어 온 길은 조국발전의 유일한 길이다”이라고 주장하였다. 


해방 후 우리 민족은 통합과 독립을 갈망하였으나 통일된 독립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가운데, 남한은 강력한 반공.반소주의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하였고, 북한은 무력통일론까지 정당화하는 적대적 갈등관계로 이어졌다.

참고자료

공보처 <<대한민국통계요람>> 공보처, 1953.
국방부 <<한국전쟁사>>제1권 국방부, 1967.
조순승 <<한국분단사>> 형성사, 1982.
윤진헌 <<한국분단사의 재조명>> 문우사, 1993.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