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행정부시기 북한과의 관계는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특히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시기였고, 한반도의 안보국방의 문제가 커다란 변화를 보인 시기였으며, 북한의 인권문제도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기였다.
김영삼 정부 시기 주요한 외교정책의 이슈는 무엇보다도 북한 핵 위기였었다
.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의심이 증폭되면서 이를 검증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과 압력이 증대되었는데
, 북한은 이에 반발하는 과정에서
1993년 3월 12일에「핵확산방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NPT)」을 탈퇴한다고 선언하였다
. 또한 그 해
5월
29일에는 노동
1호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여 핵 위기에 대한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 북한 핵 위기는
1994년
6월 중순까지 극단적인 위기상태로 치닫고 있었으나
,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합의에 의해 위기가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카터·
김일성 회담〉 이후
7월의 북미 고위급 회담으로 이어졌으며
, 10월
21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 제네바 합의
(Agreed Framework)의 기초가 되었고
, 이를 기초로 국제적 컨소시엄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Korean Peninsula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가
1995년 3월 9일에 설립되었다
.
김영삼 정부시기 북한에 발생한 중요한 안보국방 영역의 변화는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북한의 핵심 권력부에서 활동하던 황장엽의 망명이다. 김일성은 1994년 6월 중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의 핵 합의 이후 7월 말 김영삼 대통령과의〈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7월 8일 갑자기 사망했는데, 김일성 사후 북한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후계자인 김정일에게로 승계되었다. 또한 북한 권력의 핵심에서 활동하던 황장엽이 1997년 2월 12일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망명하였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의 최측근 인사였으며, 북한 주체사상의 주요 설계자로 알려져 있던 황장엽이 북한을 탈출함으로써 북한 사회의 안정성과 내부 정보에 대한 많은 의혹과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북한 사회의 변화는 한반도의 안보와 국방 분야에 있어서 김영삼 정부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1995년 이후 북한은 최악의 식량위기를 경험하게 되는데, ‘고난의 행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기는 수많은 아사자와 탈북자를 양산함으로써 북한 인권 최악의 시기였다. 북한은 1995년 여름 이후 수차례의 홍수와 가뭄을 겪으면서 심각한 식량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자연재해를 국제사회에 보고하며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호소하였다. 식량위기로 인해 많은 북한 주민들이 아사했는데,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는 1995년에서 1998년사이에 22만명 정도가 아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국제사회는 대체로 200∼30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