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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강영훈 총리 남북고위급 회담 (9월)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배경

노태우 정부는 1970년대 및 1980년대의 남북대화의 틀을 넘어 1988년 8·15 남북정상회담제의 등 남북한 고위 당국자간의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는 남북한간의 대화가 적십자 회담, 체육회담 등 인도적·비정치적 수준의 대화의 수준을 넘어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정치·군사부문에 대한 책임있는 당국자간의 대화와 교섭을 통하여 남북한간의 분단의 장벽을 실효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남북한 고위당국자간 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노태우 정부의 노력은〈7·7 특별선언〉 이후 동유럽 국가들과의 수교 진척, 그리고 한소정상회담의 개최 등 북방정책의 전개에 따른 국제적 환경의 조성과 함께 전개되었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 시기의〈남북 고위급회담〉은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1990년 9월제1차 남북 고위급회담를 필두로 1992년 10월까지 총 〈8차의 남북고위급회담〉이 이루어졌으며 남북한간의 주요 현안에 대한 고위당국자간의 책임있는 대화의 채널이 제도화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남·북한간에는 주요 의제가 토의되고 현안에 대한 교섭과 합의가 도출하였으며 〈남북한기본합의서〉의 채택 등 획기적인 성과도 거두게 되었다. 1990년 9월 4일에서 7일 사이에 평양에서 개최된〈제1차 남북 고위급회담〉은 노태우 정부시기 남북대화와 회담을 견인한 고위급 회담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내용

〈남북 고위급회담〉은 1988년 12월 28일 우리측 강영훈 총리가 북한 정무원 총리 연형묵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제의한데 대하여 1989년 1월 16일 북한측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개시되었다. 1990년 9월〈제1차 남북고위급 회담〉은 1989년 2월 8일에 개최된 〈제1차 예비회담〉 이후 수차례의 예비회담을 거치는 가운데 본회담의 명칭·시기 및 장소·대표단 구성 등 회담의 구성과 절차에 대한 사항 이외의 한미간의 ‘팀스피리트’ 훈련중지, 휴전선의 ‘콘크리트벽’ 제거 등 북한의 돌출제안 등으로 공전되었다가 제7차 예비회담(1990.7.6)에서 절차문제를 타결하고 제8차 예비회담에서 남북고위급 본회담의 일정을 동년 9월 4일에서 7일간 서울 개최할 것을 확정하여 〈제1차 본회담〉이 실시되었다.


1990년 9월 5일 서울에서 열린〈제1차 남북 고위급회담〉은 남북한 총리의 기조발언에서 남북대화의 방향과 원칙들이 모두 제시되었다. 한국측은 남북 상호간에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위에서 각종 교류협력의 활성화를 우선적으로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측은 남북정부의 실체의 인정은 곧 분단을 고착시키는 행위이므로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정치·군사적 대결상태에 대한 논의를 우선하겠다는 기조를 밝혔다.
양측의 회담 기조에서의 우선순위의 차이는 회담 의제선정·쟁점에 대한 견해차이와 연결되었다.
우선, 회담의 의제설정에 있어서 우리측은 본격적인 의제논의에 앞서 8개항의 남북관계 기본합의서 채택을, 북한은 단일의석 공동UN가입,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 방북인사의 석방 등 ‘긴급선결과제’를 주장했다.


둘째, 회담의 핵심문제인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측은 정치적 신뢰구축→군사적 신뢰구축→남북한 군비감축의 3단계 방안을, 북한은 미군과 핵무기 철수 등 외국무력의 철수를 주장했다.


셋째, 남북양측이 제시한 군비통제안은 우리측이 쌍방의 군사력과 군사적 의도의 투명성을 높이고 무기중심의 감축을, 북한은 군사훈련과 병력중심의 감축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남북양측은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 군고위당국자간의 직통전화 설치, 군비감축 합의사항에 대한 이행보장을 위한 현장검증 등에 대해서는 의견의 접근이 이루어졌다.


넷째, 정치적 대결상태의 해소방안에 대해 우리측은 서울과 평양에 상주 연락대표부설치를 제안하는 등 당국간의 협의를 통해 풀어나가자는 입장을, 북한은 민족적 단합과 통일에 배치되는 모든 법률·제도적 장치 및 물리적 장벽을 제거할 것을 강조했다.


다섯째, 교류협력의 실시 방안에서 우리측은 쌍방이 합의만 하면 실천 가능한 10개항의 세부부적인 방안을, 북측은 교류협력의 전제로써 정치적·군사적 대결상태의 해소를 요구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예비회담의 준비에도 불구하고〈제1차 남북 고위급회담〉은 남북한의 각종 현안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뚜렷한 시각차를 확인하는 회담이었다. 그러나 세부 제안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 것은 중요한 진전이었고 차후에 남북고위급회담이 연속적으로 재개되어 남북한의 주요 현안에 대한 논의와 〈남북기본합의서〉라는 남북한간의 포괄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는 계기를 마련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자료

공보처,《제6공화국실록 ②》공보처, 1992
공보처,《자료 제6공화국》공보처, 1992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