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외교

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월과 1985년 4월, 2차례에 걸쳐서 미국을 방문하고,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미 대통령을 서울로 초청하여 3차례에 걸쳐〈한·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배경

내용

〈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의 첫 번째는, 전두환 대통령이 레이건 행정부가 출범한지 1주일만인 1981년 1월 28일부터 2월 7일까지 10박 11일 동안 미국을 방문하여 2월 1일 오전 11시 백악관의 대통령집무실에서 1시간 20분 동안 진행되었다. 정상회담은 전임 카터행정부에서 제기했던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백지화했으며 안보협력의 강화, 1·12제의에 관한 의견의 일치, 한·미 간 안보협의회와 경제협의회의 즉각 개최 등에 합의하였다. 이 정상회담은 한·미 간 전통적인 우호협력관계를 확인하고 새로운 동반자관계로 발전할 것을 다짐하여 내외에 상호 신뢰의 회복을 입증하였다. 


정상회담을 결산하는 공동성명은 레이건대통령이 주최한 오찬 후 오후 3시에 발표되었다. 14개 항의 공동성명을 통해 밝힌 양국 정상이 합의한 내용은 크게 3가지였다. 첫째, 안보 면에서 주한미군 불철수를 공식 확인하고 한국군 전력 증강에 대한 미국의 협력을 명시하였다. 둘째, 남북한관계에서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폭 지지하여 한국의 참석 없이는 북한과 접촉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였다. 셋째, 경제협력 면에서는 미국이 한국을 주요 교역국으로 재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표명하였다. 


이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은, 미국이 전두환 대통령 정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과, 레이건 이전 시대의 서먹했던 양국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우호관계로 재정립한다는 것은 물론, 서구 제국과 북한에게 한국이 미국의 변함없는 맹방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한 미국의 공동성명 발표는 한국이 미국에 우방으로서 요청할 수 있는 최대치라고 분석된다. 한·미 양국이 그러한 합의에 이른 것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안정 유지가 세계평화에 중요하다는 기본적인 인식 이외에도 한국이 북한의 잠재적인 남침위협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이익과도 직결된다는 상황 판단에 기초한 것이었다.


두 번째〈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은,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레이건 대통령이 1983년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2박 3일 간 한국을 방문하여 이루어졌다. 레이건 미 대통령의 방한은 방한 직전 KAL 여객기 피격사건,미얀마 랭군 폭발테러사건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방문 기간 동안 양국 정상은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지며 한반도 위기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였다.


〈제1차 정상회담〉은 1985년 11월 12일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마친 후 청와대에서 1시간 20분간의 확대회담과 20분간의 단독회담으로 진행되었다. 양국 정상은 다방면에 걸친 상호 협력을 긴밀히 하고 확대 강화해가는 한편으로 기존 우호협력관계를 공고히 해가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이 자리에서 레이건 대통령은 북한 공산 집단의 점증하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주한 미군의 전력을 증강하고 한국군의 전력증강에 필요한 무기체계와 기술을 계속 제공할 의사를 밝혔다.


〈제2차 정상회담〉은 레이건 대통령이 13일 오전 중서부 최전방비무장지대(DMZ) 시찰을 마치고 오후에 이루어졌다. 양국 대통령은 1차 회담 당시 합의한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국제문제, 경제·외교문제, 남북한문제 등에 관하여 구체적인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외국인의 대한 투자환경 개선을 위하여 정부가 취한 노력을 설명하고, 한국의 국민 총생산이 1천억 달러에 이를 때까지 안보적 차원에서 미국이 협력과 지원을 더욱 강화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확대회담에 이은 약 40분간의 단독회담을 마친 양국 대통령은 2차례에 걸친 정상회담의 성과를 공동성명으로 문서화하였다.

 
15개 항에 걸친 공동성명에서 양국 대통령은 어느 때보다 강력한 ‘안보협력’과 협력의 동반국이 될 것을 내외에 천명하였다. 공동성명 제4항은 “대한민국의 안전이 ... 미국의 안전에 직결”된다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은 한국 방위에 관한 획기적인 의견의 일치는 미국의 구체적인 실천 약속을 동반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국방비지출에 특별히 유의한다고 밝히고, 한국군 전력 증강에 대한 지원을 명문화함으로써 FMS(對한 군사판매차관)의 상환조건·이자율·금액 등에 대해 미국 정부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시사하였다.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구체적인 과업으로 남북대화·주변국들의 현실 인정·한국의 UN가입 등이 지적되어, 공동성명 제9항에 미국이 한국의 UN가입을 지지하겠다고 명시되었다. 또한 한국정부가 정책적 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는 남북한 교차접촉의 원칙에 대한 지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로써 미국은 한국이 우려하던 일방적인 對 북한 접근 가능성을 배제하였다. 동시에 버마참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남북한 간의 대화 재개와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하여 계속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더불어 미국은 태평양지역 협력체 구성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지역의 결속을 위하여 “모든 수준”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태평양 정상회담〉에 대한 간접적인 지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전두환-레이건 정상회담〉은, 전두환 대통령이 1985년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5박 6일에 걸쳐서 두 번째 미국을 방문하여 성사되었다. 26일 오전 11시 35분부터 양국 정상은 45분간 단독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어서 오찬 회의로 들어가 북한의 군사적 도발위협에 대한 한미 공동대처방안, 남북대화문제, 미제 헬기의 북한유출문제 등 안보문제를 비롯해서 양국 간 경제협력과 통상확대문제 등 현안에 대해 논의하였다. 


같은 날 오후 1시 30분, 양국 정상은 공동성명 대신 회담결과를 집약한 신문발표문을 각국 보도진에게 낭독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안전보장을 위한 종래의 미국의 공약을 재확인하고 주한미군을 포함한 양국의 전쟁 억제 노력이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전은 물론 미국의 안전에도 직결된다는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또한 레이건 대통령은 북한군의 남진배치를 확인하고 이에 단호히 대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양국 정상은 자유무역주의와 한·미 간의 경제교류 증대가 양국의 이익과 번영에 기여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양국 정상은 모든 당면 현안에 인식을 같이 하고 있음을 새로이 입증하였다. 국내정치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현안에 대해서 인식을 같이한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2차 방미 성과는 큰 것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두 번째 방미는, 레이건 대통령의 집권 2기가 시작된 후 3개월만에 이루어져 첫 번째 방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레이건 행정부가 세계전략의 차원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위치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전대통령의 2차 방미는 미국내 진보세력이 진출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1985년의 미의회 중간선거를 앞두고 미국행정부의 확고한 對한 공약과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미국의 지지를 다짐받는 기회라는 의미로도 평가될 수 있다.

참고자료

〈주한미군철수 백지화의 의미〉《경향신문》, 1981.2.3
〈위대한 믿음위의 우방〉《한국일보》, 1982.5.22
〈레이건의 휴전선 시찰〉《중앙일보》, 1983.11.14
한승주,〈한·미 안보직결 명문화 돋보여〉《중앙일보》, 1983.11.14
〈무르익은 실질협의 분위기〉《동아일보》, 1985.4.24
〈한·미정상회담의 성과〉《중앙일보》, 1985.4.27
《실록 제5공화국 (1)》경향신문사, 1987
김정원,《한국외교발전론》집문당, 1996
《한국외교 50년》외교통상부, 1999

집필자
전상숙(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2. 0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