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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한국군현대화계획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배경
북한과의 체제대립 속에 반공을 국시로 출범한 박정희 체제에 있어 자주국방, 한국군 현대화는 일대 숙원사업이었다. 박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경제개발에 매진하는 한편, 북한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한미동맹 강화와 아울러 국방력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력이 미비하였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군의 현대화 사업은 우방 미국의 협조와 원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푸에블로호 피납 사건, 울진과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EC-121 격추 사건 등을 겪으면서 한반도의 안보 불안은 고조되었고, 동시에 박정희 정부의 국방 강화 의지도 높아갔다. 한편 1960년대 후반 북한의 모험주의 노선에 미국이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에 의구심을 품고, 자위력 향상에 신경을 쓰게 된다.


박정희-존슨 시기 베트남전쟁과 한국군 주월파병을 매개로 가까워졌던 한·미관계는 닉슨 행정부 등장과 더불어 전환을 맞게 된다. 1970년대 내내 지속되었던 한·미 갈등의 서막이 닉슨의 신한반도 정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닉슨 대통령은 취임 이후 괌 독트린을 발표하고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방위’를 천명하였다. 또한 소련, 중국과 화해를 추진하면서 동맹국 방위에 지나친 개입과 부담을 줄여 나가려고 하였다. 닉슨 행정부는 한반도정책의 유연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으로 ‘한국문제의 한국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와 변화하는 한·미동맹 관계의 틈바구니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지원과 산업성장을 동력으로 적극적인 〈국군현대화계획〉을 수립·실천하게 된다.
내용
주한미군 철수 등으로 안보불안을 느낀 박대통령은 한·미동맹 강화와 미국으로부터 안보지원의 획득에 힘쓰는 한편 70년대 초부터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8년 4월 호놀룰루 회동에서 존슨 미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점증하는 북한의 위협에 대비 〈한국군 현대화 계획〉의 필요성을 공유하면서, 미국의 군사왼조가 기여할 수 있는 사안들에 대해 검토해 나가자고 약속하였다.


닉슨 행정부의 〈주한미군 감축계획〉은 박대통령의 한국군 현대화 계획과 더불어 진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에 반대하면서 선(先) 한국군 현대화를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미국은 한국이 미군 감축을 받아들이도록 한국에게 〈한국군 현대화 장기계획〉을 수립하면 미국이 이를 돕겠다는 당근을 던졌다. 박대통령은 한국군 현대화의 구체적 방안, 방위산업 육성, 한국군 증원 등을 위해 한미협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1970년 8월 박대통령은 애그뉴 부통령과 서울에서 회담을 갖고 주한미군 감축과 한국군 현대화 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박대통령은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지원액 증액, 추가 철군 불가, 남침 시 미군의 자동개입 등을 미국측에 요구했다. 애그뉴 부통령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입각한 한국 방위와 추가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에는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 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한미군 감축이 한미간에 합의된 이후 박대통령은 〈국군현대화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건설을 추진했다. 1973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대통령은중화학공업화 정책 추진을 선언하게 된다.
참고자료
김용직 편,《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1945∼1979》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5
우승지,〈남북화해와 한미동맹관계의 이해, 1969∼1973〉《한국정치외교사논총》26집 1호, 2004.8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