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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인천상륙작전

주제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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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장군의 아이디어였다. 미국의 전쟁 참전이 결정된 직후 맥아더장군은 적의 후방지역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전략적 구상을 갖고 참모들에게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진행된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암호로 명명된 작전 계획 수립 과정에서 인천·군산·주문진 3개 지역이 상륙작전 후보지로 검토되었다. 이 중에서 인천이 상륙작전에 가장 좋은 지역으로 평가받았다. 7월말 맥아더는 이러한 작전 구상을 본국에 통보했다. 


그러나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적 후방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전략에는 동의했지만 인천지역을 상륙지로 택하는 데에는 반대했다. 특히 미국 해군의 반대가 심했다. 그 반대의 핵심은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가 협소하여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기뢰 매설시 엄청난 피해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수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여 인천항은 상륙작전에 부적절하다는 것이 미국 해군측의 주장이었다. 합참과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확률을 5천분의 1로 보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상륙작전의 성공이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는 평가에서 오히려 이 작전의 성공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합참마저 인천상륙이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면 적도 역시 미국이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고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주장은 미국 국방장관과 대통령에 의해 승인되었고 합참은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내용

인천상륙작전 개념은 부산방어선이 만들어지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7월초 미국은 미군 3개 사단을 전쟁에 투입해 두고 있었다.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은 7월말 부산방어선을 구축하게 된다. 전선이 고착되면서 공군력의 우위를 가진 유엔군은 인민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인민군의 보급선은 매우 길어졌고 유엔군의 공군력에 의해 보급조차 매우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유엔군이 후방 지역에 상륙작전을 감행한다고 하더라도 인민군은 대응할 군사적 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상륙작전에는 유엔군과 함께 국군도 참여했다.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제주도에서 3천명의 신병을 모집하여 훈련을 실시하고 있던 중 양국 간 작전협의에 따라 상륙작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군 보병 제17연대는 수도사단에 배치되어 전선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던 중 인천상륙작전부대로 선발되었다. 최종적으로 편성된 국군 상륙부대는 총 7천명에 달했다. 유엔군은 국군을 포함하여 총 병력 7만명의 10군단을 새롭게 편성했다.

역사적의의

인천상륙부대는 인천항의 확보와 해안지역 점령, 인천 통과 후 김포 비행장 확보, 한강 도하 후 서울 탈환, 부산방어선의 미 제8군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서울 근교 지역 진지 점령 등과 같은 구체적 작전수행 임무를 떠맡았다. 상륙작전이 감행되기 전에 해군과 공군에 의해 함포사격 및 공중폭격에 의해 인천지역의 적을 무력화시키고 미해병 제1사단으로 하여금 신속히 인천지역을 점령하고 김포공항을 확보한다는 전략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실시된 상륙작전은 적의 별다른 저항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인천 시가지 소탕작전에는 국군 해병 제1연대가 투입되었다. 인천경찰서 안 구치소에는 패주하던 인민군들이 무고한 시민 100여 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인천해안 교두보를 확보한 미 해병제1사단은 다음날 작전계획대로 한강으로 진격하여 김포공항을 성공적으로 확보하게 된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동시에 부산방어선에 인민군과 전선을 맞대고 있던 유엔군과 국군이 인민군의 방어망을 뚫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하여 인민군은 완전히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 시기 전쟁 기간 중 가장 많은 인민군 포로가 잡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전세는 일시에 한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은 가장 성공적인 군사작전의 하나로 전쟁사에 기록되고 있다.

참고자료

국방군사연구소,《한국전쟁 (상)》 국방군사연구소, 1995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