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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한국전쟁 배경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내용

일본 제국주의가 항복한 직후 미군은 38선 이남에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남한에 진주했고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진주했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한국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유엔 감시 하의 자유선거를 통해 탄생하였고 북한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북한 지역으로부터 완전 철수했다. 원래 미국도 1948년말 미군을 철수시킬 계획이었지만 여수와 순천에서 일어난 국군 반란사건으로 인하여 그 시기를 6개월 연기시켰다. 미국은 국가안보회의에서 결정된대로 1949년 6월말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기고 한국에서 완전 철수하게 된다.


주한미군철수가 완료되고 1949년 10월 중국공산혁명이 성공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지원해 줄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요청하게 된다. 1949년초부터 38선상에는 북한의 도발에 의해 대규모 국경분쟁이 여러번 일어났다. 스탈린은 국경분쟁이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10월말 북한에 있던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지시했다. 그 이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38선상에서 국경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과「상호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한 후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은 소련 군사고문단을 평화에 파견하여 남침계획을 작성하게 했고 최신의 군사장비를 북한에 지원했다. 전쟁 발발 이전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는 북한의 대규모 침략을 막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었다.한국전쟁 때처럼 북한이 최신의 소련 무기로 전면적 남침을 감행했을 때 한국군은 이에 대항할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은 주한미군 철수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에 대응할 수 있은 충분한 군사적 억지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