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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중소기업

전자산업육성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 육성 시책〉
「전자공업진흥법」
〈전자공업진흥8개년계획〉
〈반도체공업육성세부계획〉

배경

전자산업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라디오 수요의 증가와 1959년에 설립된 금성사를 통해 발전하였다. 특히 금성사의 설립은 소규모로 성장하던 전자산업을 기업화하는 효시가 되었고, 전자산업은 1960년대 중화학공업화 육성정책의 전략산업으로선정되면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이후, 1966년 수출전략산업으로 지정되고, 1967년 구미전자공업단지의 건설,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 제정 및 〈전자공업진흥계획〉 발표, 1982년 〈반도체공업육성세부계획〉수립 등 전자산업 육성을 위한 조치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자산업 집중육성의 계기는 당시 미국 콜롬비아 대학 전자공학 교수인 김완희 교수의 연구결과 보고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섬유공업 만으로는 수출신장에 한계가 있음을절감하였고 일본과 대만의 사례를 검토하면서 전자공업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에 김완희 교수를 국내로 불러 국내 전자공업회사들을 둘러보고 보고서를 제출해 줄것을 당부하였다. 김완희 교수는 1967년 한국의 전자제품 수출액은 655만 달러로 전체 수출액 3억2천만 달러의 2%에 불과하지만 전자공업을 육성하면 1971년에 전자제품만 1억불 수출이 가능하다고 보고하였다. 그후 1년뒤 ‘1968년 1971년 1억달러의 전자제품 수출을 위해 한국전자사업진흥원을 설립’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전자사업진흥원에서 전자〈사업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품질관리, 검사 및 시험, 기술자 시험, 외국으로 부터의 기술도입, 시장조사, TV브라운관 공장 건설 및 운영, 교육TV방송국 소유 및 운영 등을 달성해야 한다’고 연구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박정희 대통령은 상공부의 검토를 지시하였고, 이것으로 전자산업 육성정책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용

1960년대 우리나라의 전자공업은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한 후 조립하여 수출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품조립분야는 상당한 수준이었으나 부품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품공장 건설을 통한 부품의 국산화가 전자공업육성정책의 중심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다. 김완희(金玩熙) 교수의 브리핑과 연구결과를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은 상공부에 전자공업 육성책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지시하였고 상공부는 기존에 설치된 3개 기관을 활용하여 전자공업을 진흥시키는 안을 보고하였다. 이를 대통령이 승인함에 따라 전자공업육성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1969년 1월 28일 법률 제2098호로 「전자공업진흥법」이 제정되었고, 상공부는 〈전자공업진흥계획〉을 보고하였다. 보고 내용은1단계인 1971년까지 1억 달러, 제2단계인 1976년까지 4억 달러를 수출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제1단계에 62개 품목, 제2단계에 33개 품목 등 총 95개 품목을 선정하여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한국정밀기기센터(FIC), 국립공업연구소 및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중심으로 〈전자공업진흥계획〉이 본격 추진되었다. 정밀기기센터(IEC)는 전자산업정책 수립을 위한 통계, 관련업체 등록, 기술인력 및 기능공의 양성 및 해외시장 개척과 해외 표준규격 인증 대행 업무를 대행하였다. 국립공업연구소는 공산품 품질관리기구로서 중점육성대상 업체들의 전자기술 개발과 품질검사 및 지도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중점육성대상 업체들의 기술개발을 지도하고 정밀기기센터(IEC) 업무 범위를 벗어나는 특수 분야의 품질관리, 기술훈련, 기술정보 제공 등의 업무를수행하도록 하였다.



또, 부품의 국산화를 위해서는부품공장들이 한곳에 모여야 산업집적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전자공업 전문공단을 조성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고, 내륙지역으로 창원, 포항과 삼각축을 형성할 수 있고, 연구개발에 필요한 인력이 구미, 대구 지역에 상주하고 있으며, 이미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손쉽게 전자공업단지로 변환, 조성할 수 있는 구미지역을 전자공업기지로 지정하여 전자공업을 중점육성하도록 하였다. 이후반도체, 컴퓨터산업의 육성을 통한 고도의 정밀전자기기 생산체제를 갖추는 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구미단지는 전자공업단지로 특성화되었다. 1967년 9월 19일 건설이 시작되어 1971년 11월 제1공구 26만 평이 착공되어 1972년 5월 완공되었고, 이후 제2공구 60만 평, 제3공구 140만 평 등 총 200여만 평 규모의 구미 전자공업단지가 1973년 10월 5월 완공되어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자국의 높은 임금과 생산 비용 상승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선진국과 일본이 저임금의 풍부한 노동력이 있는 우리나라에 경쟁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자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981년 12월 정부, 기업 등을 중심으로‘반도체공업육성추진위원회’의 발족과 1982년 상공부의 〈반도체공업육성세부계획〉(1982년~1986년)에 따라 전자산업의 쌀이라 통칭되는 반도체산업의 육성이 시작되었다. 1983년 2월 삼성 이병철 회장이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에 진출해야하는가”라는 도쿄선언을 통해 메모리분야의 사업을 시작하였고, 1983년 11월 64K D램 개발을 발표하여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이 세계시장을 리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1984년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재 ETRI)가 전전자식(全電子式) 교환기(electronic switching system)인 TDX-1(time-division digital switching system)을 개발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참고자료

〈구미공업기지〉KTV영상홍보원 국가기록영상관 (http://film.ktv.go.kr)
〈중단 없는 전진-유신 제2기 출범〉KTV영상홍보원 국가기록영상관 (http://film.ktv.go.kr)
〈한국의 전자공업〉KTV영상홍보원 국가기록영상관 (http://film.ktv.go.kr)l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한국형 경제건설》1권~7권 ,2005
랜덤하우스중앙,《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 한국경제정책 30년사》, 2006
산업연구원,《한국의 산업정책》, 1989
한국개발연구원,《한국경제의 역사적 조명》, 1991
한국개발연구원,《한국경제반세기》, 1995
한국개발연구원 (http://www.kdi.re.kr)
산업연구원 (http://www.kiet.re.kr)

집필자
이창운(한국산업기술평가원 선임연구원)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